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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20대 총선 막전막후




20대 총선 막전막후

편집위원 | 김성욱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어느 선거나 지켜보는 입장에선 재밌고, 어느 정도 예측불가하며, 끝나면 주목할 점들이 남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번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이었다. 선거 당일까지 있었던 일련의 과정들은 국민들로 하여금 스포츠 경기를 보듯 몰입하게 했다. 그러나 선거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며, 정치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마냥 즐기고 넘길 수만은 없었다. 총선을 전후로 하루하루 웃음 짓기도, 때로는 답답하기도, 또 종종 화가 나기도 했던 일들을 기록해야 했다. 따라서 총선이라는 막이 오르기 전 무대 위에서 펼쳐진 그 많은 드라마들 중 일부를 정리했다. 그리고 막의 결말 자체가 2016년 4월 13일의 대한민국을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20대 총선이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역시 정리했다.

 

막전(幕前)

여당

사드 _ 사드(THAAD) 배치 논의는 이미 작년부터 나온 얘기였지만 총선 시점과 맞물려 보수 여당의 안보제일주의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가감없이 보여줬다. 작년부터 싸드 도입을 주장하던 정치인들은 이번 선거에서도 ‘북풍’의 일환으로 사드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실제 사드를 배치할 지역으로 자신들의 지역구가 거론되자 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당장 선거에서 이기려면 지역구 유권자들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사드로 인한 실질적 피해를 염려한 지역민들의 반대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실제 사드는 군사적 효용성과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아직까지도 논란이 매우 크다.

진박 _ 결과적으로 이번 총선은 여당이 참패했다.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해서는 이른바 ‘진박’ 마케팅이 일조했다는 평가가 많다. 진박이라는 말이 최초로 언급됐던 것은 작년 말 대통령이 총선과 관련해 “진실한 사람들만 선택해달라”라고 말하면서부터다. 이후에 정권 실세라고 불리는 최경환이 대구·경북 지역 후보들을 모으자 ‘진박’의 실체가 드러났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그다지 높지도 않고 민생 문제가 이토록 참혹한 때에 국민을 도외시하고 세 불리기에만 급급했던 진박은 ‘공천 학살’까지 이어지는 여당 내 잡음의 주인공이었다. 실제로 이 과정을 거치며 여당 지지층 사이에서는 투표 자체를 포기해버리는 양상까지 나타났다.

막말 파문 _ 총선 과정에서 가장 끔찍했던 사건은 두말할 것 없이 '막말 파문'이었다. 무려 대통령을 ‘누나’라고 부른다는 또 다른 정권 실세 윤상현이 누군가에게 "김무성 죽여버리게"라고 말하는 음성 녹취파일이 공개된 것이다. 김무성이 비박계 공천 탈락과 관련된 '공천 살생부'를 언급하자 격분하여 취중에 실언을 했다는 것인데, 어디서 누구에게 한 이야기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사건으로 여당의 내홍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윤상현은 탈당했다. 그러나 그의 지역구에 경쟁력 없는 후보를 형식적으로 공천하는 꼼수가 나타나 결국 ‘윤상현 구하기’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옥새 파동 _ 뭐니뭐니해도 공천과정에서 가장 드라마틱했던 사건은 바로 김무성의 ‘옥새 파동’이었다. 당 대표가 당의 공천결과에 불복해서 대표 직인을 가지고 자기 지역구로 도망가는 모습, 세상에 이런 코미디가 또 있을까? 어찌 됐건 이 사건으로 숙고해볼 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당 대표가 당의 공천에 불복한다는 사실 자체가 공천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둘째, ‘공천 학살’로 상징되는 공천 내용이 얼마나 비상식적이었기에 저런 비상식적인 행동이 나타났던 것일까. 셋째, 김무성과 대통령의 관계에 노골적으로 금이 갔다. 차기 대선을 앞두고 ‘자기 정치’를 하는 김무성을 대통령이 ‘진실하다’고 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유승민 _ 사실 진박이니, ‘옥새 파동’이니 하는 것들이 비롯된 이유가 유승민이라는 정치인 한 명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그가 누구기에? 유승민이 독자적 정치인으로서 이목을 끈 것은 지난해 원내대표로 선출되면서부터다. 그는 합리적 보수주의자로서 때로는 정부와 각을 세우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대통령에게 ‘배신의 정치’로 낙인이 찍혔고 결국 원내대표에서 사퇴했다. 그 후로 대권 잠룡으로서 인지도가 높아졌고 ‘친유승민계’로 분류되는 정치인들이 나타날 정도로 영향력도 커졌다. 그로서는 일련의 역경들을 거치며 ‘투사’ 이미지를 얻었다는 평가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총선에서 많은 동료들이 낙선했다.

야당

필리버스터 _ 총선 전 가장 큰 이벤트는 바로 43년만에 부활한 필리버스터였다. 필리버스터는 소수당이 다수당의 횡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시간제한 없이 반대연설을 할 수 있는 제도다. 무분별한 정보수집과 인권침해의 우려가 있는 ‘테러방지법’을 막아낼 최후의 방법으로 시도됐고, 의원마다 최장시간 돌파와 어록 등 수많은 화제를 뿜어내며 진행됐다. 특히 인터넷과 국회방송을 통해 생중계되면서 기존에 폭력적이었던 정치권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선회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정부·여당 견제라는 야당의 역할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종인 _ 20대 총선을 통틀어 빼놓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이름이 있다면 바로 김종인일 것이다. 비상대책위원회에 스스로 대표로서 군림한 김종인은 초기에 혼란스러웠던 당에 질서정립이라는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일관된 불통·호통·막말 등의 태도를 보여 여론의 뭇매를 받았다. 또 당의 지지기반인 젊은층·친노·호남을 각각 정청래·이해찬의 공천 배제와 이른바 ‘셀프 공천’을 통해 흔들었다. 애초에 ‘경제 민주화’라는 공동가치를 제외하면 그와 야권 지지층에게는 공통분모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대신에 그가 보수적 확장성을 내세움으로써 당의 외연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도 있다.

야권연대 불발 _ 수년간 선거 때마다 들려오는 이야기가 ‘야권후보 단일화’ 담론이었다. 우리나라처럼 후보에게 단 1표만을 행사하는 소선거구제에서는 야권에서 여러 후보가 나오면 표가 분산되어 사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2010년 지방선거나 19대 총선에서는 야권연대가 활발히 이뤄졌고 때마다 선전했다는 평을 받았다. 즉, 야권연대는 야권공멸을 막는 수단으로 거의 공식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20대 총선에서는 주요야당 지도자들이 야권연대를 각자의 방식으로 거부했다. 결국 국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사표방지심리를 발동하여 ‘후보는 이길 수 있는 후보에게, 정당은 지지하는 정당에게’ 투표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안철수 _ 2011년 이후로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늘 안철수였다. 과거 <무릎팍도사>에서 나타난 화려한 커리어와 반듯한 이미지로 대변되는 그는 ‘양보의 아이콘’이자 새정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현실정치를 시작한 이후에는 딱히 만족스러운 이미지를 얻지 못했다. 정치력을 떠나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다는 비판은 그를 ‘간철수’라고 조롱받게 만들었고, 특히 지난 겨울 탈당과 창당의 과정에서 야권분열의 가장 큰 책임자라고 지목받기도 했다. 그런 그가 20대 총선에서는 본격적으로 ‘자기 정치’를 시작했다. 호남의 거물 정치인들과 손을 잡아 신당의 외형을 키웠고 양당구조 심판론과 ‘일하는 국회’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대변하며 많은 지지를 얻어냈다.

문재인 _ 20대 총선에서 야권 전체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준 사람이 있다면 의외로 문재인일 것이다. 그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안철수가 탈당했고 그가 대표직에서 물러나며 김종인을 위촉해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직접 개입하지는 못했더라도 그가 지닌 영향력만큼은 컸다. 총선까지 14주 연속 대권후보 지지율에서 1위를 달릴 정도로 국민적 호감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와 반대로 ‘친문패권주의’, ‘호남홀대론’ 등 선거판을 어지럽게 하는 단어의 중심에도 그가 있었다. 김종인과 안쳘수 모두 선거 내내 그를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으며, 선거 막판에는 문재인 스스로가 프레임 속에 들어가 대선불출마·정계은퇴 카드를 이용하기도 했다.



막후(幕後)

여론 없는 여론조사

이제 잠시 4월 13일 저녁 6시로 돌아가보자. 방송사마다 출구조사 결과가 떴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뜨악했다. 처음엔 잘못 봤나 싶다가, “에이 무슨...”하며 냉소적으로 대하다가, 이내 “헐!”하며 현실로 받아들였다. 새누리당의 참패, 더불어민주당의 선전, 국민의당의 약진, 정의당 및 진보정당의 부진까지. 그 순간만큼은 모든 진영의 모든 지지자들이 그야말로 카오스 상태였다. 다시 돌아와서, 그때의 충격은 어디서 기인했을까? 그건 모두의 생각을 지배했던 '여당 압승'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수많은 매체에서 수많은 기관을 통해 이뤄졌던 여론조사가 기여했다. 하지만 여론조사와 실제는 너무나 크게 달랐다. 많게는 개헌선(200석), 혹은 국회선진화법 무력선(180석)에서 최소 과반까지 점쳐졌던 새누리당은 결과적으로 122석을 얻었다. 공천과정에서 탈당한 당선자들이 복당하더라도 과반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결과다. 더불어민주당은 또 어떤가. 보수매체에 의하면 지지난 대선 패배 직후에 치러졌던 18대 총선보다도 못한 80석 미만으로 점쳐졌다. 그나마도 호남에서의 절반 정도의 당선으로 연명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외려 불모지인 영남에서 선전했으며 수도권을 휩쓸었고 호남에서 참패했다. 대신 호남의 맹주는 국민의당이 가져갔으며 정당 지지율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을 제치고 2위를 차지했다. 더불어민주당 심판의 반사이익을 가져간 셈인데, 따라서 애초에 같은 효과를 기대했던 정의당과 원외 진보정당들은 기대에 못 미치는 정당지지율을 얻었다. 결국 여론조사와 다르다 못해 ‘틀린’ 결과를 맞이한 정치권과 국민들은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20대 총선을 기점으로 여론조사의 대대적 개편이 필요한 이유다.


여소야대 국면

20대 국회에서는 지난 16년간 보지 못했던 의석 구도를 볼 수 있다. ‘여소야대’, 즉 여당보다 야당 의석이 더 많은 것을 뜻한다. 우리나라처럼 대통령의 힘이 막강한 국가에서는 여소야대가 바람직한 구도라고 여겨진다. 실제 과거 민주화 이후에 치러졌던 13대 총선에서는 당시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이 ‘3김’에게 밀리며 비로소 실질적인 권력 견제가 가능했던 선례가 있다. 그러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이 한나라당에게 의석수에서 뒤지게 되고, 그 후로 ‘차떼기’가 됐든 ‘BBK’가 됐든 보수정당은 선거에서 거의 불패신화를 이뤘다. 오직 탄핵정국에서만 역풍을 맞아 패배했을 뿐이었다. 지난 19대 총선에서는 이명박 정부 심판 분위기가 형성되며 여소야대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 역시 무리였다. 그런데 정부·여당의 독주가 될 것이라고 예상됐던 20대 국회에서 느닷없이 여소야대 국면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많은 국민들과 학자들, 평론가들, 그리고 정치권 내부에서도 이 현상을 파악하는 데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답은 간단했다. 보통 선거는 회고적이거나 전망적이거나, 둘 중 하나의 성격을 띤다. 즉 지난 일을 심판하거나 앞으로의 비전을 본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번 선거는 철저하게 회고적이었다. 국민들은 지난 8년간 하나의 정당에 행정부와 입법부 권력을 몰아주고 그들을 경험해봤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대기업부터 동네 시장골목에 이르기까지 경제가 모조리 망가졌으며 국가부채와 가계부채에 나라가 통째로 거덜날 지경에 이르렀다.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불경기가 도래하며 민생이 파탄나고 소비는 움츠러들었다. 그 와중에 술값과 담뱃값 인상 등의 조치까지 겹쳐지면서 서민들의 지갑을 옥죄어 공분을 샀다. 뿐만 아니라 집권 초기부터 터진 인사참극과 측근비리 문제는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또 메르스 사태와 세월호 참사를 거치며 최소한의 안전도 지켜내지 못하는 정부라는 인식마저 심어졌다. 북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북한의 연이은 핵 실험 도발에 효과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못한 대처를 보이며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안보 하면 보수’라는 인식이 무색하게끔 했다. 민주주의 후퇴와 편향적인 언론환경 역시 국민들을 지치게 했고, 내내 펼쳐지는 정치권의 이전투구는 매분매초마다 ‘역대 최악’을 보여줬다. 나열한 모든 일들을 거치며 유권자들은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뜻을 가졌고 결국 그게 표심에까지 반영됐다. 정부·여당에게 힘을 몰아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적절한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즉 20대 총선은 여당의 패배는 맞지만 야당의 승리는 아니었다. 오직 국민만이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3당 출현

이제 디테일로 들어가보자. 20대 국회에선 야권에서도 독특한 구도가 형성됐다. 바로 3당 체제가 나타난 것이다. 물론 제3당이 의회 내에 큰 세력으로 자리했던 적은 역사적으로 늘 있었다. 14대 국회에는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이 있었고 15·16대에는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이, 17대에는 민주노동당이, 그리고 18대에는 이회창의 자유선진당이 있었다. 그러나 국민의당은 무려 원내교섭단체가 됐다. 원내교섭단체란 원내에서 교섭권 등의 권한과 정부보조금이 쏠리는 정당을 말한다. 20석 이상의 의석수를 지닌 정당만이 해당되는데, 15대 국회 이후 20년만에 제3당이 원내교섭단체가 됐으므로 사실 여소야대보다 더 이례적인 일이다. 지난 20년 동안 양당에 의해 좌우됐던 정치권에 제3당이 출현함으로써 비록 의석수는 더 적지만 양당을 견제하고 지원하는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어느 당도 과반을 넘지 못한 상황에서 38석이나 가진 제3당은 정국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그 배경과 의미에 대해서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더불어민주당이 국민의당에 의해 심판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지역구에서 더불어민주당의 ‘텃밭’인 호남의 23석을 차지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연유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논쟁이 많다. 이른바 ‘호남홀대론’에 관한 의견이 맞닿아 팽배해 있는 상황인데, 호남홀대론이란 참여정부 시절부터 호남이 홀대받았으며 그 중심에 문재인이 있다는 주장이다. 한쪽에서는 호남홀대론은 사실이 아니며 보수언론의 ‘문재인 죽이기’와 국민의당의 ‘문재인 떨쳐내기’의 이해관계가 맞아 형성된 아젠다라고 판단한다. 반대쪽에서는 호남홀대론이 사실이며 외려 호남의 정치적 성숙도를 비추어 볼 때 무조건 2번만 찍지는 않는다는 ‘호남세속화론’으로 논리를 발전시키기도 한다. 또 이들은 호남을 중심으로 정권교체를 이룩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어찌 됐건 호남은 국민의당을 선택했다. 즉, 호남홀대론이 옳다고 주장하던 이들이 승리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국민의당이 호남 중심의 정권교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단언할 수만은 없다. 국민의당에는 호남에서 당선된 지역구 23석 외에도 15석이 남아있으며, 애초에 안철수 지지층을 기반으로 출발한 당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남을 중심으로 당선됐지만 호남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딜레마에 처한 것이다. 이는 총선이 끝나자마자 ‘연합정부론’이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국민의당을 찍은 호남 유권자들이 정부·여당과의 ‘대연정’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지는 불 보듯 뻔하다. 따라서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제3당이 총선에서 나타난 민심을 대변하여 정국의 ‘캐스팅 보트’가 될지, 혹은 더 높은 이권을 위해 ‘대연정’을 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지역주의 변화

지난 수십년간 우리나라의 성숙된 민주주의를 방해하는 고질병은 지역주의였다. 지역주의는 단지 지역에 연고를 둔 정치인이 지역세를 누린다는 것만이 아니다.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을 장악하다시피 하는 현상을 뜻한다. ‘후보만 되면 당선도 된다’는 말처럼 본선거보다 당내 경선이 더 힘들게 여겨질 정도였다. 이는 정당들의 무사안일주의와 오만을 야기하는 정서이기도 했다. 지역주의의 배경으로 혹자는 제3공화국까지 올라가지만 3당 합당 이후에 가시화됐다고 볼 수 있다. 3댱 합당이란 민주화 이후 노태우 정부가 당시 여당이던 민주정의당과 야당이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그리고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까지 3개 정당을 한꺼번에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탄생시킨 사건을 말한다. 이는 당시 여소야대와 민주화 열기로 인한 급변에 위기를 느낀 보수 기득권층이 정계대개편을 주장하자 대권을 꿈꾸던 야당 정치인들이 떡밥을 물고 발생한 일이었다. 이로써 단일거대보수여당이 탄생했고 김대중의 평화민주당만이 호남을 기반으로 유일야당이 됐다. 그 외의 지역은 모두 보수적 색채를 띠었으며 그 후로 지역색은 고착화되었다. 그렇게 제1당은 영남, 제2당은 호남을 완벽히 차지했고 중간중간 충청을 장악한 제3당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20대 총선에서는 기존 지역주의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우선 영남을 보자.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무려 9석을 가져갔다. 이중 대구에서 야당 정치인이 당선된 것은 28년만으로, 그간 지역주의의 벽이 얼마나 견고했는지 알 수 있다. 호남에서 재선된 새누리당 후보도 눈여겨볼 만하다. 유권자 스스로가 지역주의의 역발상으로 ‘2·3번이 아닌 1번까지 찍을 수 있는’ 모습을 연이어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호남 대부분의 지역은 국민의당이 더불어민주당의 ‘대체재’로서 기능하며 석권했다. 그러나 국민의당을 단지 ‘지역정당’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정당 지지율에서 더불어민주당을 제친 2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어찌 됐건 3당 합당 이후 약 26년만에 눈에 띄게 지역주의가 해소되었다. 이는 곧 우리정치가 정상궤도에 올랐다는 말과 같아 희망적이라고 볼 수 있다.


2017 대선

내년에는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있다. 따라서 20대 총선은 대선으로 가는 길목에서 대권주자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선거이기도 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권 잠룡으로 여겨지는 정치인들이 총선에서도 후보로 뛰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문수와 김부겸이었다. 둘은 아직까지 유력한 주자는 아니었지만 여당의 텃밭으로 불리는 대구에서 후보로 붙으며 사실상 대선 0라운드를 보여줬다. 김문수가 이기면 '대구의 아들'로서 보수 세력의 힘을 얻는 상황이었고, 김부겸이 이기면 지역주의의 벽을 부수는 '승부사'로서 발돋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김부겸이 큰 표차로 당선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대권가도에 올랐다. 또 서울에서는 '정치 1번지'라고 불리며 이명박, 노무현을 당선시켰던 종로에서 오세훈과 정세균이 맞붙었다. 오세훈은 서울시장 시절 무상급식 주민투표 패배 후 정계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총선가도가 시작되자 대권후보 지지율에서 여권 1위를 차지하는 저력을 보였다. 정세균은 유일무이하게 임기를 다 채웠던 당 대표 출신으로서 2010년 지방선거를 훌륭하게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지난 대선 경선에도 참여한 이력이 있었다. 그야말로 세간의 화젯거리였던 종로는 정세균이 넉넉한 표차로 이기면서 연륜을 보여줬다. 또 직접 뛰지는 않더라도 가까이에서 영향을 주던 정치인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손학규는 이미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나 본인과 가까운 후보들을 찾아다니며 정계 복귀와 대선 출마를 암시했다. 문재인도 선거 내내 유세를 다니느라 바빴으며, 그의 ‘인재 영입’으로 입당한 후보들이 넉넉히 당선됨으로써 당내에 세를 키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김무성은 '옥새 파동'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며 청와대와 대립각을 보였지만 여유롭게 당선됐고, 역시 '옥새 파동' 탓에 여당 후보가 부재해 당선이 확실시됐던 유승민은 인지도는 넓혔지만 확고한 세력을 일구지는 못했다. 그리고 안철수는 당의 약진과 더불어 스스로도 정치력이 향상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총평해보면, 결과적으로 내년 대선을 앞두고 대권후보군에서도 여소야대 현상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은 1년여의 시간 동안 정부·여당이 후보 부재상황을 어떻게 대처할지 지켜볼 만한 대목이다.

 


김성욱

국민들은 현명했으니, 이제 정치권이 각성하길 바랍니다.

nmds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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