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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자를 위한 나라는 없나?


 

노동자를 위한 나라는 없나?

수습위원 │ 김성욱

 

‘맑스돌’부터 ‘헬조선’까지

<응답하라 1988>을 전후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혜리에게는 조금은 특별한 별명이 있다. 이름하여 ‘맑스돌’이라는 것인데, 얼핏 봐도 알 수 있듯이 저명한 사상가인 맑스와 아이돌을 합쳐놓은 말이다. 혜리는 이 별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보자마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니 대체 어떤 걸그룹 멤버가 저런 별명을 가진단 말인가. 설마 맑스주의자인가? 에이. 그게 아니라면 맑스를 언급한 적이라도 있는 걸까? 그러나 검색을 해보니 혜리 본인의 어떤 결과물이라기보단 주변 상황이 만들어낸 별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발단은 이랬다. 혜리가 찍은 광고 중엔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뒤적거렸을 구인구직 전문회사 알바몬이 있는데, 이 회사의 광고 내용이 소위 알바생을 고용하는 몇몇 업주들에겐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해당 광고와 혜리를 비난했던 글이 웹상에서 꽤 논란이 됐고, 이에 반대급부로 혜리는 알바생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아이콘이 된 것이다. 이쯤 되니 다소 의아해졌다. 대체 그 광고가 뭐기에? 찾아보니 그렇게 도발적인 광고도 아니었다. 혜리는 ‘알바가 갑이다’라는 문구를 내세우며 최저임금과 야간수당의 수호를 강조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업주에게는 깜찍한 경고를 보낸다. 그야말로 재기발랄한 광고였다.

다만 이 30초짜리 광고가 보내는 메시지만큼은 중요하고 명확했다. 노동자의 기본 권리를 지켜달라는 것. 그러나 타당하기 그지없는 이 메시지는 알바생 대 사장님간의 묘한 힘겨루기로 전환됐다. 양쪽 모두가 “우리가 더 힘들다”며 울부짖는 이 상황은 2016년의 대한민국이 ‘헬조선’으로 불리는 현상과 같은 선상에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은 진정 모든 노동인구가 힘들어 보인다. 청년들의 취업난은 세계 최고 수준이니 말해봐야 입만 아프고, 운 좋게 원하던 직장에 들어가더라도 한국 특유의 경직된 관료주의는 개개인의 ‘미생’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 국가는 창조경제를 주창하지만 현실에서 개인의 창의성보다 ‘수저’ 혹은 처세술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것은 이제 진실로 여겨질 정도다. 숨 막히는 노동실태에 노동자들은 이제 무력감을 느낀다.

 

‘노동개혁’하면 달라지나요?

소모적인 불평은 여기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바보가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정부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길 것이다. 그래서인지 작년부터 뉴스에서 자주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른바 ‘노동개혁’이 이뤄지며 이를 통해 기존 노동구조의 개선과 국가경제의 발전을 노리겠다는 방침이다. 무려 노동자·사용자·정부 대표가 대타협을 이뤄내어 합의문을 통과시켰고 이를 기초로 한 5개의 법안이 입법과정 중에 있다. 얼핏 보면 마냥 좋아 보이는 이 개혁의 내용은 그러나, 차마 개혁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구석들이 존재한다. 쟁점들을 살펴보자.

 

노동시장 유연화 - 뜻밖의 실직

박근혜정부의 전반적인 정책기조는 신자유주의의 노선을 그대로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규제 완화, 공기업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등은 신자유주의 정부의 전형적인 정책들이다. 그중에서도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모든 정부의 노동정책을 장악했던 기조다. 이번 정부 역시 다르지 않다.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정부는 노동개혁상의 ‘행정지침’으로서 일반해고요건의 명확화와 취업규칙변경요건의 완화를 제시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일반해고요건의 명확화는 그야말로 ‘쉬운 해고’를 하겠다는 의미다. 현행법에 의하면 노동자가 해고를 당할 수 있는 경우는 단 두 가지, 징계해고 혹은 정리해고뿐이다. 징계해고는 노동자가 계약사항을 위반하는 경우에 가능하고, 정리해고는 회사가 경영상 긴박할 때 가능하다. 그런데 거기에 추가로 ‘일반해고’라는 것을 도입하여 사용자의 기준에 못 미치는 사내 저성과자를 퇴출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사측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원은 그냥 해고당할 수가 있다. 미국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듯이, "당신 해고야" 한 마디에 사원은 군말 없이 짐을 싸야 하게 될지 모른다. 또 하나, 취업규칙변경요건은 기업이 근로조건이나 고용규율 등을 변경할 때 노조 혹은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는 방침이다. 그런데 이것을 완화하여 사측의 합리적 판단 하에 자유로이 변경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노조 기능 일부를 아예 없애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마저 노조가 있다면 단체행동권에 의해 사측에 물리적인 압박을 줄 수 있겠지만 노조가 없는 대부분의 사업장의 경우엔 사원들의 의사가 일방적으로 묵살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법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견해도 있다. 노동권은 헌법상 보장된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 중 하나로서 ‘법률’에 의해 보호받는다. 행정지침은 행정지침일 뿐,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노동자로서 인사·노무상의 불이익을 당했을 때 그것을 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를 침해하는 것은 헌법상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노동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기업에 실마리를 준 것이라는 비판이 크다.

 

근로시간 축소의 ‘꼼수’

2014년 OECD의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노동자의 연간 근로시간은 2124시간으로, 공휴일을 제외한 250일을 기준으로 나눠보면 매일 약 8.5시간을 일한다. 우리나라보다 근로시간이 높은 나라는 멕시코가 유일한데, 사실상 지난 20년간 1,2위를 겨뤘던 강력한 라이벌이다. 애초에 연간 2000시간이 넘는 나라 자체가 거의 없으며 OECD 평균보다 약 350시간을 더 일한다.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일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정치권이 근로시간 축소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런데 이번 노동개혁 선진화 5대 법안 중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살펴보면, 기존의 법정근로시간인 주당 40시간과 연장근로시간 12시간 외에 특별연장근로시간 8시간을 휴일에 배치하겠다고 한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원래 모든 노동자들에게 보장된 법적근로시간은 주당 40시간과 사측과 협의하여 연장할 수 있는 12시간을 더한 52시간이 전부다. 하지만 52시간 외에도 토/일요일에 각각 8시간씩을 더하여 16시간을 더 근무하도록 하는 사업장들이 많아 이것이 불법이라는 논란이 많았다. 그동안은 정부에서 이를 문제시하지 않다가 이번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행정해석상의 오류를 어느 정도 인정했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의 개정을 통해 이제 ‘법적으로’ 특별연장근로시간 8시간을 보태어 휴일 추가근무를 보장해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근로시간이 축소될 것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기존에 초법적으로 자행되던 16시간 추가근로를 이제 법의 테두리 안에서 8시간으로 줄였기 때문에 근로시간의 축소라는 것이다. 이번 근로기준법 개정이 이뤄지면 어느덧 법적근로시간은 애초보다 8시간이 늘어난 60시간이 된다. 즉, 근로시간의 축소는 순전히 말장난이다.

 

한 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에 대한 문제는 일반 국민들이 당면한 문제 중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 일단 고용이 불안정하며, 대우가 차별적이고, 적절한 보상과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양유업 사태와 같은 갑질 논란은 우리사회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는 옛말이 무색하게도, 노동부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정규직의 61.3%밖에 되지 않는다. 2013년을 기준으로 전체 노동자의 33% 가량이 비정규직이라고 하지만 무기계약직을 포함하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보면 지금 대한민국 고용정책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비정규직 문제의 해소일 것이다. 사실 현행법규에 따르면 비정규직 고용자로서 2년을 일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기업에서 이를 악용하여 채 2년이 되기 전에 해고해버리거나 다른 계열사로 옮겨 재계약하는 등의 편법을 써서 다시 비정규직으로 2년에 못 미치게 채용한 뒤에 해고해버리는 일들이 잇따랐다. 따라서 법의 개정을 통해 이를 원천방지하고 정규직으로의 확실한 전환을 보장해야 한다는 노동계의 요구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노동개혁 선진화 5대 법안 중 기간제근로자법의 개정 내용을 보면, 2년이었던 기존 비정규직 사용기간에 추가로 2년을 더했다. 즉,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정규직으로 가는 길이 더욱 멀어지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으로서’ 일하는 기간이 늘어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정규직으로서’ 보다 안정적인 고용 상황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비정규직 보호일 것이다.

 

잭 웰치와 빌 게이츠

‘경영의 신’이라고 불렸던 잭 웰치는 10만 명 이상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하는 등의 과감한 경영 방침을 통해 GE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끌어올리며 신자유주의의 화신이 되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는 잭 웰치식 경영 방식의 침체와 함께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식 승자독식의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이 ‘월가를 점렴하라’로 이어졌고 이에 따라 세계는 다시 미국과 대비되는 북유럽식 사회구조 모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독일과 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등의 북유럽 국가들은 많이 알려졌다시피 실질적 복지지출의 비중이 높아 노동자를 위한 고용복지 정책이 잘 갖춰져 있으며 성장보다 분배의 형평성에 집중한다. 국가의 시장 개입이 큰 것 역시 특징인데,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위협하는 기업간 독과점 행태나 불공정 거래에 대한 규제가 강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이유에서다. 그 결과 사회적 불평등이 최소화되었고 국민의 삶의 질이 높아졌다. 최근 미국에서는 임기의 막바지에 다다른 오바마 대통령이 최저임금의 15달러로의 인상과 전국민의 노조화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는 분명 북유럽 국가들의 사례를 염두에 둔 주장이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국 대선의 흐름 역시 눈에 띈다.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는 수십 년의 정치경력 동안 북유럽 모델에 대한 열망을 보였던 후보다. 그는 이번 대선에서도 중산층과 서민, 노동자를 위한 정치를 하겠다며 대기업 억만장자들과 월가 자본주의자들을 강력하게 비판했고, 결과적으로 소수점대의 지지율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비등해지는 수준에 이르렀다. 즉, 미국식 자본주의의 가장 실질적인 피해자였던 미국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동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여론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의미다. 또, 세계 최고의 부자라고 불리는 빌 게이츠는 ‘창조적 자본주의’로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이는 기업들이 기부나 자선활동을 통해 기존의 주주 중심의 기업구조에서 탈피하고 서민과 노동자, 그리고 지불능력이 부족한 계층으로 하여금 지속가능한 자본주의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렇듯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이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이제 대한민국의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이 최선 혹은 차선이라는 단어보단 최악에 가깝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절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역시 정치권의 변화가 최우선일 것이다. 지난 2012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선거의 화두 중에는 ‘경제 민주화’가 있었다. 이는 당시에 여당과 야당을 떠나 어느 정도의 국민적 공론화가 이미 이뤄져 있던 사항이었다. 그러나 ‘선거의 해’가 끝나자마자 이 화두는, 적어도 서민의 관점에서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통령의 선거 공약을 보자. 해고요건의 강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의 노동정책이 있었으나 이것들 역시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4년이 지나 우리는 다시 총선을 앞두고 있다. 결국 실제적인 변화는 정치권으로부터 일어난다. 그리고 그 변화는 국민들이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노동자다. 인간은 노동을 함으로써 자아실현을 하며 돈을 벌어 삶을 경영하고 미래를 대비한다. 가끔 우리는 이 자명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혜리의 30초짜리 광고가 그랬듯, 노동자라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노동자의 권익을 향상시켜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당장 저 멀리 ‘헤븐’ 국가들처럼 노동실태가 발전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변화에 대한 의지를 표명해야 함은 분명하다. 큰 주목을 받았던 작품 <송곳>에는 “살아있는 인간은 빼앗기면 화를 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웁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아마도 이 말이 진정한 노동개혁의 시작일 것이다.




김성욱

nmdst@naver.com


마지막 부분을 쓰면서 이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극중 부당한 상황에 처한 상드라는 일에 대한 확신도 없고 

투쟁의식이 높은 것도 아니지만 노동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지키기 위해 힘들어도 계속 걸어 나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