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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프라임사업에 관한 성찰



프라임사업에 관한 성찰

수습위원|김형민


 

대학의 학문이 나라의 수요와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이런 전ᄎᆞ로 어린 대딩들이 취업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종국(終國)에는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노미 하니라. 내 이를 어엿비녀겨 새로 스물 한 개 대학을 프라임 사업에 선정하노니 원컨대 각자 수비니겨 날로쓰매 취업하는데 편안케 하고저 할 따라미니라.

-교육부-

 


이번 프라임사업에 선정된 21개(대형 9개교, 소형 12개교) 대학에서 총 5351명 규모의 대학 정원이 조정된다. 그 중4,429명이 공학계열로 옮겨지고 인문, 자연, 예체능 등의 비(非)공학계열은 그만큼의 정원이 줄어든다. 더욱이 프라임사업에 신청했지만 탈락한 54개 대학 중 일부 대학도 계획 했던 학사 구조 개편을 단행할 것으로 보이면서 프라임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대학 학사구조개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교육부의 대승적 견지에 의한 ‘정무적 판단’으로 행해진 민족 최대의 학사구조개편은 전(全)대학의 과기대화, 전(全)대학생의 공대생화를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쯤에서 프라임사업이 무엇인지 모르는 독자를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고 교육부의 위대한(?) 결정에 파생된 문제와 원인을 짚어보자.

 

프라임사업 정확한 이름은 ‘산업연계 교육 활성화 선도대학사업’(PRogram for Industrial needs-Matched Education)으로, 학령인구 감소에 따라서 교육부가 대학에게 사회적 수요 중심의 학과 개편을 주문한 사업이다. 프라임사업에 선정된 21개 대학은 매년 150억 원(대형 9개교) 또는 50억 원(소형 12개교)의 정부 지원금을 3년간 받으며 학사구조개편 작업을 할 수 있게 됐다. (무려 6,000억 원 규모 사업이다) 쉽게 말하자면, 학령인구가 감소해 대학정원을 조정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것을 빌미로 학과 정원을 공학계열로 몰아 취업난을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육부 관계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프라임사업을 통해 2023년까지 평균 취업률을 약 7.7% 포인트 향상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교육부가 주장한 ‘사회적 수요 중심 학과’는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교육부 자료와 여러 보도 자료를 종합해보면, 교육부는 한국고용정보원이 제공한 ‘산업별·직업별 중장기 인력수급 전망’에서 공학계열 신규인력으로 연간 2만8000명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한국고용정보원의 인력수급전망이 기준과 근거가 부실하다는 지적이 있다. 여기까지가 팩트(fact)다.

학령인구 감소와 최악의 실업률이라는 현재 상황을 직시한다면 프라임사업은 적절한 사업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아주아주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을 필자는 역설하고 싶다. 일단, 프라임사업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자.

 


대학들의 성급한 계획

대학의 발전을 위해 돈이 필요한 대학들은 교육부의 이러한 사업계획에 너나 할 것 없이 과감히 공학계열 중심으로의 학사구조개편을 ‘셀프’로 계획한다. (프라임사업에 탈락한 광주대는 입학정원(1644명)의 무려 30%에 달하는 500명을 공학계열로 이동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물론, 대학의 발전을 위해 학사구조를 개편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육은 백년대계(百年大計)’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대학들이 너무 성급한 개편계획을 했다는 것이 문제다. 2015년 초에 발표된 이 사업이 2016년에 실행됐으니 약 1년 정도의 시간밖에 없었고, 선정 및 검토 과정 기간을 뺀다면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대학들이 학사구조개편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물론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학내 학생들과의 소통은 미덕의 영역으로 치부됐다. (건국대의 경우에는 폐과 사실을 학생들에게 카카오톡으로 전송했다) 이렇게 단시간 안에 어떠한 소통도 없이 민족 최대의 학사구조개편을 진행하니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성신여대는 개강과 동시에 프라임사업 반대 시위를 진행했으며 이어서 인하대, 이화여대, 서울대, 한양대, 고려대 등 대학과 시민사회 그리고 여러 언론에서 프라임사업에 대한 반대와 우려하는 목소리가 현재까지 나오고 있다. 또한 이러한 성급한 계획은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취업난 해결을 위해 공학 중심계열로 학과를 전면 개편하는 것 역시 성급하다는 것이다. 시대 변화에 맞는 사회적 수요가 정말 공학이었는지에 관한 충분한 토론과 여론이 없었다. 또한, 공학계열 중심으로 학과 개편이 정말 취업난을 해결할 수 있는지에 관한 충분한 근거와 자료가 제시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취업=공대=대학’이라는 어설픈 삼단논법으로 인해 인문, 예체능 계열 학문이 졸지에 쓸데없는 학문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문과 및 예체능 수험생은 자아분열 중.

프라임사업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는 비단, 인문 계열과 예체능 계열 대학생들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2017년 대입 수능을 준비하고 ‘문과 및 예체능’ 학생들은 현재 ‘자아분열’을 겪을 정도 심적 부담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당신이 현재 문과 고3 및 n수생이라고 가정해보자. 일단, 당신이 진학하고 싶은 학과는 예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왜냐면 현재 문과 대입을 준비하는 학생 수는 그대로인데 진학할 수 있는 학과는 대폭 줄어들지 않았는가. 만약 현실을 인정한다면 지금 당장 적성은 개나 줘버리고 수학2와 미적분, 물리를 준비해야 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어떻게 하겠는가? 원하는 학과에 진학하려면 우주의 기운과 조상 신(神)의 강림이 있어야 하고, 현실을 인정하고 진로를 바꾸면 자신의 정체성을 바꿔야 한다. 어떤 선택이 현명한 것인가? 한편에서는 대학들이 ‘교차지원’이 가능하게 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뉘앙스를 보이며 말한다. 하지만 예측되지 않는가. 그들이 교차지원에 성공해서 대학에 입학한다고 해도 대부분 학생들은 적성에 맞지 않아 곧 반수 및 재수를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프라임 사업’의 근본적인 성찰

방금 우린 프라임사업 자체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 대강 살펴봤다. 그렇지만 무리한 학과 통폐합은 우리가 종종 봤던 사건들이라서 충격이 덜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필자는 좀 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행태들의 천박함을 설파하고 교육부의 정책이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역설하고 싶다.


대학 서열과 프라임사업?

1984년 미국 레이건 정부 시절, 보수주의자들은 베트남 패전의 이유를 60년대 반전, 학생, 히피, 민권운동, 좌파운동에서 찾았고 이러한 문화의 본거지가 대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미국 보수 매체인 시사주간지 The US News and World Report가 미국 대학의 순위를 전체 그리고 학과별로 매겨 처음으로 보도하면서 인기를 끌었고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대학 순위 정하기’가 비판의 공간이었던 대학을 죽이려고 의도적으로 만든 현상이라는 점이다. 그 결과 미국의 대학들은 철저한 자본주의적 경쟁이라는 덫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학이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대학을 졸업한 인재들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추상적인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게 됐다. 대학의 순위가 곧 자신의 순위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대학 순위 정하기가 우리나라까지 영향을 미쳐 중앙일보가 매년 전국의 4년제 대학들의 순위를 발표한다. 더욱이 현 교육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학 구조개혁평가’라는 명목으로 3년마다 전 대학을 5등급으로 나누어 평가하고 그에 따른 강제적인 정원 감축과 재정 지원 제한을 함으로써 대학 경쟁을 매우 심화시켰다. 대학 경쟁을 자본주의 경쟁의 구도로 해석하는 이유는 평가기관이 원하는 지표지수를 올리기 위해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취업률 역시 평가 지표 대상이기 때문에 프라임사업의 재정지원과 취업이 상대적으로 잘되는 이공계열 중심의 학사구조조정은 대학순위를 올리기 위해 사활을 건 대학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대학서열에 대학이 목숨을 거는 이유는 우리가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건동홍......’이라는 전근대적 주문을 외우고 다니는 것에서 기인한다. 출신 대학으로부터 자신의 사회적 계급을 찾으려는 우리 사회의 관습이 대학들로 하여금 주문의 순서를 바꿔달라고 하는 암묵의 메시지로 들리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대학의 욕망과 대학으로 우열을 가르는 사회적 관습이 프라임사업이라는 민족 최대의 인문계열, 예체능계열 학살의 배경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상기하자. 최초의 ‘대학 순위 정하기’는 무슨 의도로 시작됐는가?

 

프라임사업은 정치적 프레임에 불과하다.

여기까지 읽느라 수고했다. 여기부터가 사실 필자가 진정 말하고 싶은 부분이다. 그렇다면 필자가 좋아하는 군대 이야기로 포문을 열겠다. 군대에서는 문제가 발생하면 다음과 같은 판단절차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어떤 병사 둘이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다가 싸운다.’-> ‘그렇다면 컵라면이 문제다.’->‘전 장병 컵라면 금지.’ 익숙하지 않은가? 비슷한 문제를 한 번 더 내보겠다. ‘한 장병이 외출을 나갔다가 사고를 쳤다.’->‘그렇다면 외출이 문제구나’->‘전 장병 외출 통제.’ 자. 충분히 군대식 논리전개를 보았다면 프라임사업에 칙용해보자. ‘청년 취업률이 심각한데 특히 인문계열과 예체능계열이 심하구나.’->‘그렇다면 인문계열과 예체능계열이 문제다’->‘인문계열, 예체능계열 학과통폐합’. 이러한 논리전개가 답답하지 않은가? 두 장병이 라면을 가지고 싸운 원인은 뜨거운 물의 부족일 수도 있고, 외출 나가서 사고 친 장병은 부족한 장병 월급이 원인일 수도 있으며 취업률이 심각한 이유는 사회적 구조 문제일 수도 있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배제하고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만 치환하려는 원시적인 사고와 그러한 해결을 오히려 모순적이게 천편일률적으로 행하는 것이 현 교육부의 수준이다. 필자가 프라임사업이 철저한 정치적 프레임이라고 주장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프라임사업이 마치 취업난을 해결하기 위한 대승적 견지에 의한 정책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려는 ‘꼼수’로 보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보자. 우리나라는 현재 공대생들이 부족해서 기업들이 채용을 못 하고 있는 처지인가? 혹시 정부와 교육부가 자신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취업난 해결에 대한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네가 돈 안 되는 걸 전공으로 선택해서 취업이 안 되는 거야. 다 네 책임이야”라고 메시지를 던지며 그 책임을 오히려 대학과 학생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래서 필자는 교육부의 프라임사업 취지가 최악의 실업률을 개인의 문제로 프레이밍(framing)하기 위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침탈한 대학

마지막으로 이야기해봐야 할 것은 ‘대학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거대 담론이다. 누군가는 대학을 ‘진리의 상아탑’, ‘학문의 전당’ 등과 같은 고매한 문장으로 대학을 규정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대학을 ‘취업을 하기 위한 교육기관’ 즉, 직업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인다. 무엇이 맞는가? 필자는 임마누엘 칸트의 ‘대학론’에서 대학의 정의를 빌리겠다. 칸트는 대학이 전문 직업인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인정하면서도, 대학의 핵심은 이성이라고 주장하며 교권이나 정권에서 자유로운 학문을 꿈꾸었다. 그 자유로운 학문이라는 것은 이성의 자율성과 내적인 요구를 원칙으로 여기는 철학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다시 말해, 법학, 의학, 신학 (당시 신학은 실용학문이었다.)은 전문 직업을 얻기 위한 학문이고 나머지 학문은 모두 철학으로 분류되었는데 이 분야만큼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대학’. 이것이 칸트의 독특한 ‘대학론’이자 근대를 거쳐 오늘까지 이어온 대학의 본질이다. 칸트의 말에 힘을 빌리자면 직업을 위한 대학도 필요하지만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대학은 더 필요하다. 학문의 자유와 세상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이 대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전(全)대학의 과기대화를 꿈꾸는 것처럼 보이는 교육부의 프라임사업은 자본의 가치로 대학의 본질을 학살하는 천박한 행위이다.

 

우리는 부품이다. 그들에겐.

카를 마르크스의 말로 마무리를 하려 한다.지배 세력의 이데올로기로는 그 시대의 정신으로 전파되고 통용된다. 나아가 시대의 정신을 넘어서 인간의 본래의 모습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87년 민주항쟁으로 쟁취한 ‘학원의 자유’는 이미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지배세력에 의해 무참히 파괴됐다. 이쯤이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태초의 진리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조금만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대학은 완벽한 직업학교로 거듭날 것이다. 또한, 조금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 생각하면 일제강점기의 식민지교육과 현 교육부의 교육정책 방향이 다르지 않음을 필자는 느낀다. 일제는 조선인을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착하고 성실한 단순 기술자’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들에게 조선인은 인간 아니라 제국주의의 부품에 불과했다. 현 교육부가 인문, 예체능 계열을 죽이고 공학계열로만 대학을 구성하려는 속셈은 대학을 자본주의의 부품을 만드는 공장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프라임사업을 지켜보면 자꾸 마르크스의 말이 떠오른다.


 

김형민

 학이시습지면(學而時習之)면 놀지 못 한다.

radioofuniv@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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