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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내

[기획-대학] 대학-교육=대학



대학-(교육)=대학


명예위원 | 남영주


 우리는 앞선 기사의 이야기처럼 대학을 가야만 하는 사회에서 자랐다. 우리에게 대학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다. 고등학생의 우리는 이미 대학으로 향하는 길 위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대학으로 밀려들어 왔다.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지도 않고 대학으로 밀어 넣은 사회는 좋은 교육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대학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대학 교육의 실태에 대해 짚어본다.



 가면을 쓰고 착한 일을 하고 다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가면을 부러웠던 한 사람이 그 가면맨을 죽였다. 그리곤 그 가면을 쓰고, 가면 흉내를 냈다. 하지만 그는 원래 가면처럼 착하지 않았다. 착한 일을 가장해 나쁜 짓을 하기도 했고, 사리사욕을 채우기도 했다. 가면에서 원래 사람이 빠지고 가면의 행동은 달라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가면을 계속 존경했고 가면의 속이 바뀐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대학에 교육은 없다


 사실 가면 이야기는 우리 대학의 이야기이다. 대학에 교육은 이제 없다. 교육이 사라진 대학 만이 있을 뿐이다. 즉 대학이라는 페르소나를 쓴 대학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곳을 대학이라 모두들 믿고 생각하고 있다.

 대학이 ‘진리의 상아탑’이던 시절이 있었다. ‘상아탑’이란 말은 “물욕과 현실적 이해를 떠나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 학문의 세계가 상아처럼 깨끗하고 고고하다[각주:1]”라는 뜻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다시 말해 대학은 시장 원리의 작동부를 벗어나, 진리만을 탐구하는 대학 세계의 열정을 이야기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대학을 상아탑이라 부를 수 없다. 우리의 대학 세계는 결코 학문을 탐구하거나 진리에 대해 토론하는 열정의 결정체는 아니다. 2016년의 대학에 그런 교육이란 없다.


시대의 트렌드를 따라가자


 2016년의 사회는 70·80년대의 사회와는 많이 다르다. 당연히 대학도 많이 달라져 왔다. 70·80년대의 대학은 사회 저항의 기지 역할을 했다. 러비만 해도 그렇다. 80년대의 책엔 움찔할 정도로 저항적인 기사가 실렸다. 그 이후 대학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적 팽창을 겪었다. 대학의 수가 급증했으며, 96년 대학 정원 자율화에 따라 대학생의 수도 급증했다. 대학생이 된다고 가방끈이 길어지지 않는 사회가 도래했다. 다시 말해 대학 졸업장이 다른 사람보다 많이 공부했다는 의미를 잃게 된 것이다.

 졸업장이 의미를 잃어버린 사회에서 대학이 해야 한 노력은 분명했다. 다른 대학보다 ‘좋은’ 학생을 배출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따옴표에 가둬진 ‘좋은’은 트렌드에 맞는 학생을 뜻했다. 그런데 대학이 말한 트렌드는 학문이나 교육 방식의 트렌드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시장의 트렌드였다. 대학은 시장이 원하는 인재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학과의 크기를 재조정했다. 시장의 트렌드를 따라가는 가장 쉬운 길이었기 때문이다. 특정 학과의 입학 정원을 늘리거나 줄이면 대학은 시장이 원하는 인재를 많이 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를 잘 드러내는 예가 있다. 1999년 이후 15년 동안 대학의 정원증가분의 1/3이 경영학과 증가분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문계열의 정원은 12% 감소했고, 수학·물리·천문·지리 분야는 절반가량 줄어들었다. 그리고 공학계열의 정밀·에너지 분야는 10배 이상 증가했다[각주:2]. IMF 경제 위기 이후 사기업 취업시장에서 공학계열의 선호도가 높아졌고 대학은 이에 맞춰 정원을 조정했다. 문제는 한 학문의 정원이 증가할 때 다른 학문은 줄어들거나 없어졌다. 이런 변화는 대학의 본디 목표에 조금도 걸쳐있지 않다. 우리 대학의 ‘트렌드’는 경제권력의 요구에 따라 변해왔고 변해왔다. 경제 권력은 이윤 추구라는 단순하면서 분명한 목표 아래서 그 주변의 모든 것을 시장화시키고 있다.


취업사관학교


 이런 트렌드 때문에 우리 피부에 느껴지는 교육의 형태도 변했다. 우리의 교육에 진리에 대한 탐구욕이 아닌 다른 권력이 들어왔다. 가령 중앙일보 등의 언론사에서 시행하고 있는 대학평가, 정부가 주체가 되어 대학을 평가하는 ‘구조개혁평가’ 등이 대학의 교육에 작용하는 큰 권력 중 하나이다. 대학 외부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평가는 대학에 큰 영향을 끼친다. 언론사의 대학평가는 대학의 경쟁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입시철이 되면 중앙일보 대학평가는 입시생과 학부모가 대학을 선택하는 ‘공정[각주:3]’한 기준이 된다. 또한 정부의 대학평가 역시 정부의 입맛으로 대학을 줄 세우고 바꿔놓는다. 구조개혁평가의 결과에 따라 대학은 정원을 감축해야 한다. 심지어 프라임, 코어 사업과 같은 정부 지원 사업을 선정할 때 정부는 노골적으로 취업률이 낮은 학과를 폐합하라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현재 대학 외부에서 대학으로 들어오는 권력들은 대학을 ‘취업’이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대학을 변화시킨다.

 우리 대학을 포함한 많은 대학에서 교육과정과 행정제도 등을 대학평가의 평가기준에 맞춰 변경시켰다. 우리 대학의 경우 외국인 학생의 비율과 영어전용 강의의 비중이 높아졌다. 그리고 학점삭제제가 사라졌고, 재수강 제도가 일부 수정됐다. 이런 변화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대학평가에서 대학이 높은 점수를 받는 방향으로의 변화라는 것이다. 이렇게 외부에서 우리 대학을 평가하는 기준에 맞춰 대학은 변화되어 왔다. 외부의 대학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대학 서열화를 조장한다. 대학을 한 줄로 세워놓고 학벌을 강화한다. 또한 특색이 다른 여러 대학을 한 기준으로 평가하기에 모든 대학을 일원화시킨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몇몇 대학의 총학생회에서는 ‘대학평가 반대 운동’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취업시장의 논리, 입시시장의 논리에서 야기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양적 팽창된 대학 사회는 시장의 요구에 맞는 인재를 길러내야 했고, 그에 맞춰 그들의 ‘교육’을 변화시켰다. ‘취업 사관학교’라는 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대학에 오는 목적이 취업일 수 있다. 그리고 대학이 인재를 만들어 나갈 때 취업은 빼놓을 수 없는 기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업사관학교’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우리는 그것뿐인 대학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시스템을 망가뜨리는 변화와 노골적으로 ‘취업’에 목숨을 거는 모습에 느꼈던 우리의 분노는 아니었을까. 


너희에게 ‘교육’을 사하노라


 대학은 우리에게 ‘교육’의 가면을 쓴 시장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맞으니 너희에게 이 멋진 ‘교육’을 사하노라!’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민주주의에서 이런 계몽적 교육체계는 권력의 입맛에 맞게 사람들을 세뇌시킬 뿐이다. 하지만 대학 교육의 실용성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 실제로 산업 현장에 적정한 인력이 대학에서 양성되고 있지 않다는 말인데, 실례로 SK그룹의 인사기획팀에서는 “산업구조와 기업의 필요성에 따라 사회적, 경제적 실무 능력을 갖춘 인력이 필요한 실정[각주:4]”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교육부의 고등교육 실무자는 이미 10년 전에 “교육 방향은 실무 중심이나 경쟁력강화에 맞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런 논의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가야만 하는 사회’는 이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 고등학생 모두를 대학에 몰아 놓고는 ‘취업 교육’을 하겠다며 대학에서 ‘학문’의 자리를 줄이고 있다. 그들에게 ‘학문’을 배울지 ‘취업’을 배울지 물어보지도 않고 말이다. 

 진리의 상아탑, 학문의 전당, 나아가 서울대의 상징과도 같은 ‘진리는 나의 빛’... 오래도록 대학을 부르던 단어들이다. 대학은 아카데미즘의 성역이다. 단기적 시장의 수요, 기업의 입맛이 아닌 장기적인 철학에 의해 교육이 이뤄져야 하는 곳이다. 기형도 시인의 <대학시절>은 학생은 감옥으로 군대로 끌려가고, 총성이 울리는 교정에서 플라톤을 생각하는 학생이 나온다. 비록 사회 운동에 내몰렸지만 철학을 생각했던 대학생이 그곳에는 있었다. 박사학위를 영어로 Ph.D라고 한다. Ph.는 철학(Philosophy)을 뜻한다. 대학은 애초에 그런 곳이었다. 대학을 학문을 배우고 토론하는 곳으로 만드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대학도 그런 곳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업과 교육부 그리고 정부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학생들을 취업이라는 벼락에 내몰아 놓고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교육’이라며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시장,  정부에게 ‘그런 교육’을 내림받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 마음 속의 대학


 이렇게 대학은 노골적으로 변화되어 왔다. 그리고 그 변화는 올바른 방향의 변화라 말해왔다. 하지만 그 결과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취업난은 10년 동안 계속 나빠지기만 했다. 교육이 실용주의 노선으로 갈아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와 동시에 학생들의 삶의 질은 더 나빠졌다. 수도권과 지방 대학의 극심한 양극화가 일어나 학벌주의라는 사회의 깊은 홈을 만들었다. 끝을 모르는 등록금 인상은 학생들의 주머니를 깃털보다 가볍게 만들었다. 교육에 만족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아져 대학 권력과의 갈등은 80년대 운동권 이후 가장 심해졌고, 심지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각주:5]

 대학은 학생들이 학문을 통해 수없이 많은 가능성을 확인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학문을 탐구하고 토론을 하는 곳이 되어야지 외부의 권력이 뿌리내리는 곳은 아니어야 한다. 하지만 현 시대의 대학은 경제권력, 지식권력 등 많은 권력을 학생들에게 확인시켜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심지어 학생에게 대학이 스스로 권련이 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우리는 대학의 구성원이고, 등록금을 낸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교육 서비스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대학이 이렇게 변화할 동안 우리의 목소리는 받아들여졌는가. 진정한 논의과 대화는 있었는가.


이럴 때 초심을 외쳐야 하는 이유


 여기에 짧은 러비의 이야기가 있다. 80년대 사회 저항에 대한 필요성으로 생겨난 교지는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기존의 권력을 감시하고 권력에 저항적인 목소리가 소위 ‘잘 안 팔리는’ 기사가 됐다. 논의과 토론 끝에 우리는 ‘잘 팔리는’ 기사를 쓰기로 했고, 책에는 점점 가볍고 말랑말랑한 글들이 채워졌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구독률은 오르지 않았고 인지도는 점점 떨어졌다. ‘트렌드’에 한 번 맞춰보자는 우리의 생각은 잘못됐던 것이다. 몇 년 전 또 다시 긴 토론이 있었고 우리는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결정을 내렸다. 교지의 역할을 권력을 감시하고 그에 대한 토론의 장을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을 다시 상기했다.

 대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학에는 본디 목적이 있을 것이다. 현 시대의 대학은 그 목적에서 벗어나 취업사관학교화, 기업화되어 가고 있다. 지금은 그 초심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토론할 시간이다. 우리가 떠밀려 들어온 대학이 학문을, 교육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깊은 아이러니는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남영주

youngju6107@gmail.com

이 기사 뒤로도 우울한 기사가 참 많습니다.

부디 우울하다 피하시지 마시고 읽어주세요.

우리의 이야기니까요.





  1. 대학신문, <상아탑>, 2012.10. [본문으로]
  2. 대학교육연구소, <1999년 이후 대학 정원증가분의 1/3 경영학과>, 2015. [본문으로]
  3. 사실 공정하지 않다.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할 뿐이다. [본문으로]
  4. 연세춘추, <지성의 요람인가, 취업사관학교인가>, 2004 [본문으로]
  5. 일례로 2011년 카이스트에서는 ‘공부지옥’에 고통을 느껴 학부생 4명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