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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내

[기획-대학] 학벌주의, 그리고?




학벌주의, 그리고?


편집장│민경연


 우리는 누구나 약 12년에 달하는 정규교육과정과 사회화 과정을 통해 차별은 나쁘다고 배운다. 그 결과 모두 인종차별과 성별에 따른 차별이 나쁘듯이 학벌에 따른 차별이 나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미 학벌의식은 많은 이들의 내면에 굳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학벌주의에 따른 차별은 취업의 현장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어떠한 기준점으로, 혹은 자신의 위치를 증명하기 위한 어떤 것으로 오용되고 있다. 지방의 유명하지 않은 대학에서 사건이 발생하면 관련 기사에는 ‘역시 공부 못하는 애들은 어쩔 수 없다.’ 류의 댓글이 무수히 달린다. 소위 말하는 명문대, 혹은 고학벌인 사람이 학벌주의를 비판하면 소신 있는 주장이라 말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학벌주의를 비판하면 자격지심 내지는 열등감으로 치부하곤 한다. 

 

 “와 나도 대학 교육 비판하고 학교 그만둘까.”

 “아니. 우리 학교 같은 지방대는 자퇴가 아니라 자살을 해도 뉴스에 안 나와.”

 “그냥 있어야지.”

-인터넷 게시판, 대학 교육을 비판하고 자퇴한 K대 김 모 씨의 사례를 본 이들의 대화


 “대기업에서 인서울 A대학 정도까지는 서류도 안 보고 버리지는 않는대. ○○아 너희 학교가 A대보다는 높아서 다행이다.”

-명절날 대학 이야기를 하던 친지의 발언


 또한 일상 대화에서조차 사람들은 자기도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학벌의식을 드러낸다. 도대체 학벌이 무엇이기에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는가?


학벌주의란 무엇인가?


 학벌(學閥) 

1.학문을 닦아서 얻게 된 사회적 지위나 신분. 또는 출신 학교의 사회적 지위나 등급.

2.출신 학교나 학파에 따라 이루어지는 파벌.


 사전적 의미로 학벌이란 같은 학교 출신으로 구성된 집단이 어떤 사회적 지위나 등급을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2번과 같이 학벌을 단순한 출신 학교에 따른 파벌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족하다. 파벌이야 만들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단서가 달린다 한들 학연과 다를 것이 없다.

 학벌은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집합적 자기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학벌이 이렇게 공유된 ‘학벌의식’에 의해 결속된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어떤 지속성을 갖는 집단적 주체가 될 때 이 주체는 사회적으로 실체를 갖는다. 사회적으로 실체가 존재하는 공동체에는 자연적 공동체인 가족, 인륜공동체인 회사, 정당, 종교단체 등등 그리고 근대적 국가, 마지막으로 인류공동체가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학벌은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연고 관계로 인해 발생하므로 자연적 공동체가 아닌 인륜적 공동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벌은 이에 들어맞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학벌은 일종의 가족에 가깝다. 

 전통적으로 한국사회는 효와 예를 중시하는 가족중심 사회였고, 가족 안에 속해있을 때 사회적 존재를 확보할 수 있었다. 국가와 권력 역시 확장된 가족사회에 지나지 않았고, 혈연적 가족애 속에 숨겨진 가족이기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런 사회에서 권력투쟁이 가족 단위로 이루어지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사회가 무너지고, 사람들은 이를 대체할 가족적 공동체를 찾아 모였다. 이에 가장 적합한 것이 ‘같은 학교 출신’임을 중심으로 한 학벌 관계였다. 학벌은 한번 얻으면 쉬이 변하지 않았고, 폐쇄적이었으며, 일종의 계급으로서 작용해 구성원들에게 계급적 동질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즉 과거의 전통문중이 하던 일을 대체하기에 충분했다.

 한 사회에서 권력이 불평등하게 배분될 때, 언제나 이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합리화 과정이 요구된다. 전통사회에서 그것은 배움이었다. 더 많이 배운 이가 못 배운 이를 통치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오랫동안 이 사회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학문-시험공부-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학문은 그 자체가 아닌 권력을 위한 도구로 존재하게 되었다.

 전통사회에서 학문과 권력이 공존하였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라도 한국 대학교육의 초창기는 일제에 의해 왜곡되었다. 빼앗은 권력에 대해 아무런 정당성도 제시할 수 없었던 식민지배자들은 민중의 저항 의지를 교육이라는 좁은 출구로 배출하려 하였다. 민중의 권력 획득 욕구를 위한 수단으로 시험을 만들고 이를 최종 목적이 되게 만들어 사회적 저항 의지가 증폭되는 것을 봉쇄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는 해방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교육을 통한 출세와 성공이라는 환상과 그에 따른 극단적인 입시경쟁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사회의 모순을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것을 방해하고 사회변혁 욕구의 분출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장치였다. 


학벌주의는 어떻게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았나?

 현재 무한경쟁, 입시 위주 교육 체제의 목적은 오직 하나다. 명문대학 진학. 그 체제에서 ‘시험 성적이 좋은 것’은 일종의 절대적 선(善)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누릴 수 있는 유무형의 혜택을 누리고, 권력을 갖게 된다.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그들이 그러한 혜택과 권력을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이미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함=탁월함’이라는 신화를 주입받고 그 체제에 맞추어 사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셈이다. 이 신화는 학벌이 높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이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 믿는 환상으로 이어진다. “공부 안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과 “공부를 더 하면 남편/아내 얼굴이 바뀐다.”류의 저급한 표어가 여전히 먹히는 것은 공부라는 신화가 건재함을 증명한다. ‘노오오오오력을 해라.’라는 말 역시 이와 이어진다. ‘노오오오력’을 통해 무한경쟁에서 승리하여 좋은 학벌을 얻으면 무조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는 덧없는 환상이 사람들의 눈을 가려 개개인이 가진 제반조건과 개성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배치표, 언론사 대학평가 등의 눈에 보이는 줄 세우기 또한 학벌주의가 내면에 굳어지는 데 부채질한다. 입시생들은 배치표를 보며 자신이 갈 만한 대학과 자신의 ‘급’을 매기는 일에 익숙해진다. 교사들은 학생들 개개인의 희망과 적성보다는 배치표 상에서 가장 높은 대학에 보내는 일에 더 열중한다. 대학들 역시 이를 방조하며 홍보와 수익 창출의 수단정도로 인식한다. 언론사의 대학평가는 어떠한가? 대학 교육의 실질적 질보다는 양적 평가에 치중할 뿐이지만 대학 입장에서는 이것이 인지도와 평판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지 못한다. 혹자는 언론사의 대학평가가 기존의 고착화되어있던 ‘서연고서성한…’의 학벌 계단을 뒤흔들 수 있어 긍정적이지 않느냐고 평하지만 단지 층계 위에 올라간 이름이 바뀔 뿐 학벌주의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미디어도 학벌주의의 내면 고착화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매 해 대학수학능력시험 시즌이 돌아올 때 마다 뉴스는 온통 수능과 관련된 이야기로 도배가 된다. 수능 만점자와 전국1등 인터뷰는 훈장처럼, 어쩌면 최고선(善)을 달성했다는 미담처럼 널리 알려진다. 심지어 신문에는 전국 고등학교 서울대 보낸 사람 수가 특집으로 실리기까지 한다.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관련한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 해도 그렇지 않은 대학에 비해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90년대 프로농구를 출범시킬 정도로 인기 있었던 두 유명 명문사립 대학 간의 정기전이, 그 대학들의 라이벌정신을 따지기 이전에 그들에게 붙은 ‘명문’이라는 타이틀이 없었더라면 그만큼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미디어를 통해 학벌을 향한 치열한 경쟁과 명문대학의 중요성을 익힌 수험생들은 더욱 경쟁에 골몰하고 심하면 경쟁의 결과(학벌)에 따라 스스로의 급을 매기거나 타인을 판단하게 된다. 


계단 안의 계단

 그토록 힘든 입시전쟁을 거쳐 소위 말하는 ‘명문대 간판’을 손에 넣었다고 해서 차별의 계단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정시는 성골, 수시는 진골 등으로 대학교 입시 전형에 따라 급을 나누거나, 지역·기회균형선발 등을 통해 선발된 학생을 ‘지균충’, ‘기균충’이라는 멸칭으로 격하하기도 한다. 심지어 같은 대학 같은 캠퍼스 내 다른 학과 간 입결을 비교하며 우열을 가리기도 한다. 한겨레21에 연세대 독립언론 ‘연세통’이 기고한 「“감히 연세대 동문동문 거리는 놈들...”」은 이것을 무척이나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학벌주의가 단순히 같은 학벌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하며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넘어서 내면에 내재화되어 남보다 나은 자신의 위치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모습이다. 사회학자 오찬호는 이를 ‘학력 위계주의’라 칭하고 과거의 학벌주의와 구분한다. 그는 오늘날의 학벌주의를 학벌이 형성되어 대학서열이 만들어지는 형태가 아닌 그 존재하는 서열을 지킴으로서 ‘학력’의 객관적 차이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태도로 정의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대학 이전의 ‘빛나는’ 기록을 학벌의식에 편입시키기도 한다. 명문이라 불리는 고등학교를 나온 이들이 과잠에 출신 고등학교 마크를 함께 새겨 넣는 등의 행동이 그러하다. 「“감히 연세대(후략)”」에서는 이 원인을 갈수록 격화되는 경쟁사회에 대한 학생들의 불안심리가 작용한 것이라 분석한다. 학벌보다도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배경과 집안의 재산, 소위 ‘수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 시대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위치를 인정받고, 안심하고 싶어 하는 비틀린 심리가 학과·전형에 따른 차별로 드러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차별’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간판<수저?

 2016년 2월, 시민단체 ‘학벌없는 사회’가 해산했다. 학벌주의가 없어졌기 때문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학벌사회와 대학서열체제, 학벌을 통한 신분 대물림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명문대 나와도 힘든 시대’라는 말이 반증하듯 학벌이 권력 획득의 가장 큰 기제로 존재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자본에 의한 권력이다. 현세대는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이 자조적으로 나돌 정도로 자본에 의한 격차를 느끼는 세대다. 물론 이 문제는 무척이나 복합적이다. 자본의 격차는 다시금 학벌의 격차와도 연결되어 있다. 최근 몇 년간 대학 입시의 변화는 준비할 수 있는 재정과 지원이 충분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유리하게 변화해왔다. 2002년부터 2016년까지 대학의 수시 선발 비율은 29%에서 67.5%까지 매년 상승했다. 수시 전형 중에서도 학생부종합전형이나 논술의 경우 상대적으로 더 많이 준비할 여유가 있는 ‘금수저’들에게 특히 유리하다. 타고난 자본을 바탕으로 보다 많은 지원과 교육을 받고 자라난 ‘금수저’들이 명문대학에 진학하고, 이들이 보다 쉽게 사회 요직에 진출한다. 사실 그들에게 학벌이 ‘아주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학벌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것 중 하나일 따름이며 단지 그들의 이름 앞에 붙는 액세서리다. 

 이런 시대에 ‘학벌’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조금은 부질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자본권력이 학벌을 압도한 시대라는 사실이 거꾸로 학벌에 대한 집착과 경쟁 심리를 강화시킨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본을 가지지 못했기에 남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더욱 학벌을 얻고자 하게 되고, 그 중에서도 자신의 위치가 남들보다 승리에 가까이 있음을 증명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선망하는 학벌을 얻고도 박탈감을 느끼고, 애초에 논의에서 배제된 대부분의 비 명문대생은 또다시 ‘지워진’ 채 열등감을 느끼거나 학벌을 향한 누군가의 열망을 강화시키는 재료로 사용된다. 씁쓸한 대학사회의 단면이다. 



민경연

lemonamelona81@gmail.com

학벌 같은 거 신경 안 쓴다고 말하면서도 학벌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문득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