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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차마 소리치고 다닐 수 없어 적는 예술학과 학생의 넋두리




차마 소리치고 다닐 수 없어 적는 예술학과 학생의 넋두리


 

편집위원⎟강연주


 

 성신여대의 예술학과 통폐합 관련 기사를 보았을 때, 당신은 무어라고 생각했는가. 나처럼 죽자고 덤벼드는 사람에 대한 기대보다 이제 이런 화제는 지겹다고 인상을 찌푸릴 사람에 대한 걱정이 훨씬 크다. 아마도 다른 학문에 대해 공부하고 있을 누군가는 ‘예술학과가 또···.’하고 고개를 저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그들은 양반이다.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토하는 내게 ‘그런 일도 있었어?’ 하며, 옆집 개가 집을 나갔다더라 하는 말을 들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당장 내 곁에만 해도 양손을 넘어선다.

 이 화제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없다. 단순히 나와 관련 있는 학과의 입지가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원인은 스스로의 한심함에 있다. 이제 예술학과 존엄성의 위기는 한물간 화제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고, 자연스레 언급하기 조금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먼지 쌓인 화두를 꺼낼 때마다 으레 마주하게 되는 미적지근한 반응 때문에 괜히 뒷목을 문지르기를 몇 번. 이제는 반응이 영 별로다 싶으면 재빠르게 화제를 돌리는 데 도가 텄다. 괜히 매달렸다가는 나쁜 인상만 더하겠거니 하면서 핑계를 대곤 하지만 사실 지겨움이 비치는 눈동자를 도저히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생긴 능력이다. 함부로 다른 이들에게 보일 수 없는 화는 이런 곳에서부터 피어오른다. 나는 대체 왜 내 밥줄을 걱정하면서 남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가.

 여기에서까지 이런 글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물론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이야기가 당신에게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당신이 예술학과가 아주 멀리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옆집 개가 집을 나가든, 새끼를 몇 마리 낳았든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마는 것은 그것이 담벼락 너머의 이야기에 그치기 때문이다. 당신의 개가 집을 뛰쳐나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같은 반응을 보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문제를 남의 집 이야기로 치부하지 않았으면 한다. 여기까지 읽고도 당신은 아마 시큰둥한 표정일 텐데, 다행히도 지금 내겐 보이지 않기에 꿋꿋이 몇 자 더 주절거려보겠다.

 

나도 미술이나 해볼까?

 그립지만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학창시절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볼까 한다. 국어국문학과와 국어교육학과 사이에서 헤매던 나는 고삼이 되고 나서부터야 본격적으로 문예창작학과로 진로를 정하고 입시에 매진했다. 당장 다음 주가 시험인데도 백일장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일이 허다했다. 수업시간 틈틈이 문제집 대신 소설책을 들여다보곤 했다. 수학 시간에 수학 문제를 푼 기억은 물론 있을 리 만무하다. 수능까지 남은 날짜가 두 자리로 변하기까지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도 반듯하니 새것 같던 내 문제집을 반 친구가 어떤 눈빛으로 봤는지는, 새삼 가슴이 아파오기에 굳이 따로 묘사하지 않겠다. 내가 알기론 우리 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하려 한 학생은 전교에 나 하나뿐이었다.

 인문계인 우리 학교에선 예술학과에 진학하려는 학생들도 가뭄에 콩 나듯 했고, 따라서 나는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을 찾아 인터넷 카페를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다. 게시글 대부분은 원하는 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차지하고 있었다. 불투명한 미래와 마주해 너무도 불안한 나머지 오갈 데 없는 분노를 두서없는 글로 표출한 사람도 물론 적지 않았는데, 그중 하나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밤늦게까지 미술학원에서 영혼을 불태운 뒤 학교에 온 미대 입시생이 책상에 엎드려 모자란 잠을 보충하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문제집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짝이 ‘넌 공부 안 해도 되니 부럽다. 나도 미술이나 해볼까?’ 하고 한숨 쉬듯 중얼거려 애먼 사람 복창을 터뜨렸다는 이야기. 당시 글 작성자는 사람이 너무 황당하면 오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나는 구태여 그 글에 댓글을 달지 않았다. 저런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을 들어도 크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술의 허들이 많이 낮아진 것은 사실이다. 누구든 글을 쓸 수 있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창작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나는 이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예술을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아무나 예술을 할 수 있다고 내뱉는 데 있다. 수능 완성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이게 영 적성에 안 맞는 것 같고, 그럼 어디 한 번 샤프 대신 붓을 들어볼까, 하는 그 가볍기 그지없는 태도에. 그렇게 예술은 우주 최고로 만만한 존재가···되는 건 내가 너무 앞서가는 거겠지. 아무튼, 나는 지금 예술학과에서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예술 하면 안 된다고 단정 짓는 것이 아니다. 공대를 다니면서도 얼마든지 소설을 쓸 수 있고, 용접하다가도 물감을 집을 수 있다. 그러나 물리 공부가 너무 하기 싫은데 만만한 소설이나 써볼까 하는, 용접은 힘들고 위험하니 쉽고 안전한 그림이나 그려볼까 하는, 그런 태도는 곤란하다. 예술은 당신이 하고 있는 어려운 일 대신이 될 수도 없고 생각처럼 그리 만만하지도 않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다면 시험 기간에 다빈치관 앞에서 소제목을 중얼거려보길. 중요한 깨달음은 때로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을 필시 유념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무너져 내린 학문의 전당

 지겹지만, 취업률에 대한 이야기는 빠지려야 빠질 수가 없다. 사실 예술학과 존엄성의 위기니 예술의 접근성이 지나치게 좋아졌느니 하는 이야기 전부 차치하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화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 녀석이다. 슬프게도 이제 고흐 역시 미취업자라는 말은 대중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는지 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물론 중요하지만,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에 대해 되돌아보며 내 진로를 구태여 바꾸려 하지 않으신 부모님께 무한히 감사할 수 있는 기회도 함께 가질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진로에 대해 크게 고민한 적이 없는데, 이는 내가 어떤 명확한 목표를 이미 쟁취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목표를 향한 길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뭘 좋아하는지는 알고 있는 자기편협적인 성격 덕분에 진로를 정하는 데는 큰 망설임이 없었다. 힘든 것은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때뿐이었다.

 때문에 온갖 문학상 작품집을 섭렵하던 학생이 문학과는 전혀 관련 없는 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는 글을 읽었을 때는 제법 충격을 받았다. 거듭 말하지만, 비예술학과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예술을 하면 안 된다고 비판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만약 그가 다른 학과에서 공부하는 것을 선택했다면, 나는 그 선택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학생의 선택은 철저하게 그의 부모님의 개입으로 인해 결정되었다. ‘굳이 대학까지 가서 그걸 공부해야겠니?’ 라는 그들의 질문은 단순히 자식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과보호가 지나친 부모에 관한 이야기로 단정 지어질 수 없다. 질문의 탈을 쓴 타박은 내게 새삼 대학의 본래 의미가 이제 완전히 무너졌음을 실감케 했다.

 예술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가 바로 학문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있는 학생과 소설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학생에 대해 각각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무나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는 단순한 방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대학까지 가서 그걸 공부할 필요가 있어?’라는 질문을 만약 내가 받았더라면, 밤새도록 물감 냄새에 취해 허우적대던 어떤 학생처럼 너무 황당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소심한 주제에 곧잘 울컥하고 마는 피곤한 성격 때문에 그 자리에서 냅다 ‘당연하지!’하고 소리쳤을 수도 있겠다. 어떻게 반응했건 시간이 지나면 후회할 것 외에도, 부정을 요구하는 질문에 긍정으로 답했을 것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나는 이런 질문이야말로 답이 정해져 있는 부류라고 생각한다. 예술 역시 학문이다. 물론 형식은 조금 다르겠지만, 예술학과 학생들도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본다. 어떤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서 여타 다른 학과들과 별다를 바 없는 것이다.

 자식이 걷고 싶어 하는 길을 가로막은 부모의 말에는 그 학과에 가면 취업이 되지 않을 테니 단념하라는 의도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더 나아가, 애초에 왜 예술을 하는 데 공부가 필요한지에 대한 진지한 의문 역시 느꼈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각종 예술학과 통폐합 기사를 보며 그 의문이 부모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었다. 예술학과의 학업을 웬만큼 가볍게 보지 않는 이상, 과를 아무렇게나 합치든 혹은 아예 지워버리든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수 없을 테니. 학생들이 예술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자꾸만 사라져 가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돈을 버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애초에 예술을 공부한다는 것 자체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기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순수하게 학업에만 열중할 수 있는 곳이 아니게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그리고 애초에 그 학업의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예술학과 학생들의 학업의 전당은 두 번 무너져버린 셈이다.

 

결코 영원하지 않을 고통

 얼마 전 간신히 지나갔고 가슴이 미어지지만 이제 곧 다시 돌아올 시험 기간에도 예술에 대한 인식을 찾아볼 수 있다. 현재 다른 지역의 미대에 재학 중인 내 친구는 요즘 아주 죽어 나간다. 수업이 끝나면 앉은 자리에서 그림을 하루에 수십 장씩 그려야 한단다. 물론 교양수업을 제외하고는 시험 보는 과목은 하나도 없다. 혹시라도 이걸 보며 부럽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부디 이 글을 처음부터 한 자 한 자 다시 읽어보기를. 잘못 짚어도 여간 잘못짚은 게 아니다. 당신이 미대생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도운 것이니 부디 내게 감사했으면 한다. 이건 당신의 사회적 생명을 지킨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다. 앞에서 몇 번이고 이야기했듯 내 친구가 하는 일 역시 공부다. 그건 미적분 푸는 것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 역시 마음을 살찌우려 한 게 아니라 대학 가려고 공부한 것이다. 노파심에 말하자면 물론 대학도 공부하고 싶어서 온 거다. 전국의 다른 학생들과 다를 바 없는 우리는, 그러나 어째서 영원히 고통받아야 하는지. 어느 회사든 바라는 인재상은 정해진 답을 외워 적을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물론 막상 입사하면 또 다른 이야기겠지만) 새로운 답을 적어낼 수 있는 창조성을 지닌 사람이면서 창조의 메카를 짓밟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술학과의 위기는 잊을 만하면 몇 번이고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술학과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고통은 좀처럼 쉽게 끊어질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주변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던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나 같은 사람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리고 지금이 글이 끝을 맺을 때까지 읽고 있는 당신이 존재하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우리 일이라는 생각이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이 고통도 사라지지 않을까.

 

 

강연주

ㅠㅠ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건만...!!

kkyj070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