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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내

[기획-대학] 대학에 가야만 하는 사회



대학에 가야만 하는 사회


편집위원 | 강연주


 고삼치고 대입을 준비하지 않는 자 없다지만, 한 학교 내 수백의 학생이 한 명도 빠짐없이 동일한 목표를 향해 달린다는 데는 분명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다. 수능을 치르고 몇 해가 지나서야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 문장을 마냥 당연하게 받아들여도 되는지 조금씩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수능을 준비할 당시 이런 의문을 떠올리지 못한 스스로를 조금 변호하자면, 경주마용 눈가리개를 쓰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건 줄곧 정면을 향해 달리는 것뿐이었다. 고착화되어 가고 있는 잘못된 사회 풍조가 어떻든지 보다 내 목표가 우선인 것이 사실이었고, 그 목표까지 마지막 한 걸음을 앞둔 시기였기에 시야가 좁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함께 그저 달리기만 할 뿐이었던 친구들 모두가, 그러나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우리는 저마다 진로 고민으로 골머리를 썩혔지만 그 중 대학 진학 여부에 관한 것은 없었다. 학과는 어디로 정해야 할지와 같은, 스스로의 선택에 함부로 확신을 갖지 못하는 고민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직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한 그들 앞에, 과연 어떤 목표가 있다고 해도 좋을지 의문스러운 한 편. 그러나 시야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기엔 우리 학교에서만 수백 명, 전국을 통틀어 셀 수 없이 많은 학생들이 합격증을 받기 위해 몸부림쳤다. 달리는 우리 앞에 정말 골인 지점이 존재하는지, 그 골은 우리가 스스로 지정한 게 맞는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왜 끊임없이 달려야만 하는 건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은 보통 이런 사사로운 질문에서부터 시작하기 마련이다.  


아주 많고, 너무 많다

 몇만 명의 수험생은 봄이 오기 전까지 모두 자신들의 대입 결과를 통지받을 것이다. 만족스럽든 그렇지 않든, 아무튼 제 이름이 적힌 대학 발송 우편물을 받게 된다면 다음 해를 기약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학생이 되는 것이다. 2000년 이후 우리나라의 진학률은 늘 상승세를 보이고 있지는 않으나 큰 하락도 보이지 않는다. 근소한 차이가 있을 뿐, 몇 년째 70% 이상의 대학 진학률을 유지하고 있는 실상인 것이다. 

대학 진학율 (단위:%)

OECD 국가중 대학 어디가 많이 가나 (단위:%)

 이는 절대적으로도 적지 않은 수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할 경우 상대적으로 더욱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장 가까운 나라인 일본보다 30% 높은 수치를 보이며 OECD 국가 평균 대학 진학률과도 20%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위의 그래프에서 가장 적은 진학률을 보이는 이탈리아와는 무려 40%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이탈리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마주칠 수 있는 대학생의 확률이 2분의 1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 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우리나라에는 이탈리아 보다 두 배나 많은 대학생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아득해지기도 한다.

 지나가는 젊은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붙잡을 때 학생이라는 호칭을 흔히 사용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만나는 대부분의 젊은이가 학생일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단정 지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만나는 대부분의 젊은이는 학생 신분일 것이기에 이 호칭은 널리 쓰이기에 큰 무리가 없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아주 많고 너무 많은 학생들이 존재한다.

 

좁힐 수 없을 몇 걸음

 대학 진학률은 국가의 지식수준과 비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이 다른 국가보다 몇십 퍼센트나 높다고 해서 다른 국가들보다 뛰어난 성취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국가에서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장려하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를테면, 대학생 수가 많은 것이 사회 내에서 어떤 문제도 되지 않는다거나. 그러나 우리나라의 상황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회 풍조가 만들어진 데에는 마찬가지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중, 고졸자와 대졸자의 임금 격차가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력별 초임 임금격차 차이 (출처:교육부)


 우리나라의 고졸자와 대졸자 임금 격차의 양극화는 점차 극단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경력이나 실력보다는 학력이 더욱 주목받는 것이다. 대학에서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교육과정이 존재하지 않는 직업이라고 해도, 4년 동안 경험을 쌓은 사람보다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쥔 사람이 더욱 많은 임금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경력자와 고학력자 사이의 격차는 조금씩 쌓여서, 언젠가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차이를 만들 것만 같다. 사실 지금도 그리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을 조금 벗어난 것 같긴 하지만.

 훗날 어떤 길을 가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그보다 가깝게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우선 대학에 가고 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서울을 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지방 거점 국립대에, 그것도 안 된다면 일단 입학할 수 있는 곳에 입학 원서를 넣고 보라는 것이었다. 대학생 자녀를 둔 아주머니가 고삼 딸을 둔 엄마에게 전한 충고의 골자가 그것이었다. 물론 대학에 진학하고 난 후에 천천히 너의 길을 찾으라는 꿈같은 뉘앙스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조롱하거나 부담을 주기 위한 말도 아니었다고. 그 아주머니는 진심으로 충고해 주었을 뿐이다. 아무리 노력한들 그만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진즉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물론 현재 우리 사회에서 크게 잘못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학은 일단 가야 하는 곳이다. 학업 성취나 다양한 활동을 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OECD회원국 대졸·고졸 임금격차. 고졸임금=100 기준. (출처:OECD)


 물론 학력에 따른 임금의 차등은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격차의 수치가 높으며, 영국과도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일등은 아니니 안심해도 되겠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런 생각이 잠시나마 스쳐 지나갔다면 부디 정신을 차려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비교는 필요하지만,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무용한 결과로 위안을 삼아서는 안 된다. 학력에 따른 임금 격차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한 대뿐인 엘리베이터

 개천에서 용 난다는 거 다 옛말이다. 애초 이무기로 태어난 사람으로서 인정하기 괴롭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개천에서 태어난 이상 숨을 거두는 곳도 개천인 게 당연한 요즘 아닌가. 그래도 아주 다 죽으라는 건 아닌지, 간혹 용이 되어 승천하는 사람도 간간히 있기는 하는 모양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그들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다. 흙이 금으로 변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기는 정말 쉽지 않은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대학에 가는 것 외에는 떠올릴 수가 없다. 물론 그게 아주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효과가 있기는 한지 자체도 의심스럽다. 좀체 떨어질 줄을 모르는 대학 입학률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면 과연 대학에 가는 것을 지위 상승의 기회로 분류하는 것이 망설여진다. 현재 대학에 재학 중인 나부터가 도통 하늘로 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은 마당에. 그러나 대학을 졸업한 뒤 그 전보다 한 단계 높은 곳을 디디는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가까이에는 없더라도 한 다리, 두 다리, 아무튼 몇 다리씩 건너다보면 분명 ‘성공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자꾸만 우리들에게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증명해준다. 안빈낙도가 삶의 신조인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 가능성에 매달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너무나 희박하지만 분명 거기 존재하는 가능성, 유일하다고 봐도 크게 무리가 아닌 기회를 좇아 사람들은 대학의 문턱을 밟게 되는 것이 아닐까.

 편의점이든 패밀리 레스토랑이든, 아무튼 아르바이트생이 있는 곳에선 학업의 중요성에 대해 일깨워주려는 부모님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눈치는 보이는지 목소리를 낮춘 채, 그러나 귀 기울이면 못 들을 것도 없는 음량으로 ‘너,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아르바이트생을 향한 동정과 거리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곁눈질이다. 이 과정을 통해 부모의 몸에 밴 사회 풍조가 그대로 자식에게 전달될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험하고 힘든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렇게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서서히 머릿속에 박히게 된다. 자란 아이에게 대학 입학 여부에 대한 고민은 애초에 만들어지기 힘들다. 그들이 하대했던 아르바이트생이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 간 학생인지 아닌지는 물론 그 부모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아마 별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자녀가 자라서 대학생이 되었을 때,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면접을 볼 때 즈음에, 그때가 돼서야 조금은 생각이 달라질까. 물론 또 다른 부모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을 보며 자녀를 훈육할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대학생

 학문의 전당이 무너져 내렸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새삼스러운지. 무너진 잔해 사이로 발 디디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억울한데, 억울해하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 덕분에 더 서럽다. 우리는 이미 보이지 않는 손에 떠밀리는 데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제대로 된 목표도, 마음가짐도 없이 무작정 대학에 온 사람들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조금씩 대학이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단계라고 가르친 부모님들을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학생들을 뚝 떨어뜨리는 사회에 대해서는, 그러나 탓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상치 못하는 곳에 자기 발로 뛰어드는 것도 충분히 힘든 일이다. 하물며 원하지도 않는데 우선 뛰어들고 봐야 한다는 사회 풍조만 믿고 깊고 컴컴한 굴속으로 내딛는 사람은 어떠할지, 우리는 모른다고 할 수 없다. 거기에 시계를 보며 혼잣말을 하는 흰 토끼 따위는 없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할 만큼 어두우나 어느 누구도 그 길이 끝없고 험난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구덩이와 기꺼이 거기로 뛰어들도록 재촉하는 보이지 않는 손만이 존재할 뿐이다.




강연주

kkyj0705@naver.com

학문의 전당이 무너졌다는 표현이 이제는 상투적으로 느껴진다는 게 너무 슬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