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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외부기고] "너, 한남충이니?" - 메갈리아가 쌓아 올린 새로운 규범


러비는 사회의 여러 논쟁적 문제에 대한 학내 구성원들의 기고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 기고의 주제는 메갈리아와 페미니즘입니다. 이 기고를 시작으로 러비가 조금 더 학내 구성원들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되길 바라봅니다. 이에 대한 반박, 찬성, 혹은 전혀 다른 의견 모두 환영합니다. 



[외부기고]

“너, 한남충이니?“ 

-메갈리아가 쌓아 올린 새로운 규범-


 타타(학내 성소수자 인권동아리 ‘큰따옴표’ 소속)



 최근 여러모로 여성 유명인들이 다사다난하다. 자기 SNS에 남이 단 댓글에 ‘친절하고 상냥하게’ 답해주지 않았다고 하연수는 욕을 바가지로 먹었고, 예쁜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프로배우의식을 갖추라(배우 자신이 추레해져도 상관 안 하는 ‘메소드연기’를 하라)는 이율배반적인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박신혜는 사과문을 썼다. 이뿐이랴. 정가은은 모유수유 하는 셀카를 올렸다고 관심종자 소리나 듣고 있고 김자연 성우는 아주 온건한 페미니즘 문구가 적힌 티셔츠 하나 구매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당했다. 

 어떤 이들은 위에서 말한 일련의 일들이 당사자가 여성이라는 것 빼고는 아무 관계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당사자가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이 지독한 여성혐오(misogyny)에 오염되어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돌아올 그들의 답변은 뻔하다. “남자가 그랬어도 똑같이 반응했을 것”이라 항변하거나 “이건 성차별 문제는 아니고 다른 문제”라고 진단하거나. 또, “여성 연예인을 욕하는 건 개인 인성 문제지, 사회문제는 아니다”를 외치며 공동체적인 해결의 책임을 회피하고 “메갈리아는 여자 일베니까 김자연은 해고당해도 싼 것”이라며 여성주의에 기꺼이 ‘따끔한’ 일침을 날릴 것이다. 

 우리 언어와 문화의 지형은 그들 생각대로 평탄하지 않다. “성별을 떠나서”는 애시당초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언어는 반드시 우리가 딛고 살아야만 하는 울퉁불퉁한 땅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쓰는 것으로 이미 우리는 적어도 조금은 ‘성’에 관련한 위계를 재생산하고 있다. 그리하여 경향적으로 남성은 우위에, 여성은 열위에 위치하게 된다. 이를테면, 언어는 섹스가 남성에게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성에게는 ‘수치스러운 것’으로서 여기게끔 규정한다. 결과적으로 사회에는 섹스와 관련한 수많은 차별적 서사가 양산되며, 이는 수많은 여성의 고통을 낳는다.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는 젠더위계적 구조를 끝까지 부정하는 이들은 예측건대 대부분 생물학적 남성일 것이다. 한국가부장제는 권력주체를 지나치게 자유롭게 키운다. 시스젠더 남성이 자신의 젠더로 말미암아 자신의 몸과 정신을 규제하는 정도는 여성에 비해서는 새 발의 피다. 그 자유에 가부장제 남성의 무례함과 폭력성, 찌질함과 자의식과잉이 기인한다. 과도하게 자유로운 개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한다. 여태껏 활개 치던 자신들을 ‘부당하게’ 옥죄는 여성주의가 그들에게 눈엣가시일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이 여자 일베로 칭하는 메갈리아는 감히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연관되는 이가 다짜고짜 직장에서 해고당하게 할 만큼 악한 집단이 되었나. 정말 메갈리아는 그들 생각대로 “진짜 페미니즘과 하등 관련이 없는 것”이며, 그곳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목소리를 기각할 정도로 거대한 악인가. 메갈리아를 재판하는 주류남성의 입장은 과연 객관적이고 중립적인가.


메갈리아는 무엇을 했나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름짓기’란 이성애자-성인-남성중심의 기득권과 질서를 수호하는 ‘혐오’의 한 종류다. 이름짓기는 언제나 하향식으로 행해지는데, 그렇기에 지금까지 낙태충, 김치녀, 맘충 등은 널리 쓰이고 유통될 수 있는 어휘였던 반면, 개념 없는 남성을 특정하는 단어는 경향적으로 만들어지지도, 쓰이지도 않았다. 남성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일련의 여성혐오적인 언어는 여성을 억압한다. 여성은 그 언어가 죄로서 규정지은 것들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며, 그 위반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사회의 감시가 전혀 무겁지 않은 분위기로 행해진다. (“너 혹시 김치녀야?”, “생리하냐?”, “담배는 여자 몸에 안 좋아.”, 등등…….)

이를 미러링의 언어로 되받아친 것이 메갈리아다. 지금까지 여성이 당했던 억압의 언어들을 성별만 바꾼 채 그대로 반사하는 전략을 통해 그들은 “지금 이 상황은 잘못됐다”고 크게 외쳤다. 여성혐오는 아주 사소한 데에서부터 시작해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것까지, 그 스펙트럼이 아주 넓었기에 메갈리안의 언어 역시 표면적으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었다.(온건하고 미약한 혐오만을 반사한다면 그것이 과연 미러링인가?) 메갈리안들은 이 사회가 조용하고 천천히 쌓아올린 여성혐오 규범의 크기만큼 ‘한남충’들을 격렬하게 공격했다. 메갈리안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폭력적인 언어의 표면이 아니라 그 내부를 봐야 했다. 그 안에는 혐오 아닌 분노의 목소리로서 “우리도 살고 싶다”는 절박한 외침이 있었다. 그러나 남성 중심적인 한국사회와 권력자-남성일반은 메갈리아의 목소리와 말을 기각했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저항의 불길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메갈리아가 망하기까지 몇 개월 동안 여성주의적 연대가 가능한 ‘새로운 언어의 장’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여성과 여성주의를 위해 절박한 이들은 서로 모여 싸울 힘과 용기를 얻고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면서 얻은 상처를 치유했다. 이것이 메갈리아의 가장 큰 의의라고 본다. 그러나 또 하나, 메갈리아에서 이루어낸 의미 있는 행동이 더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남성일반에게도 모종의 규범을 따라야 할 의무를 지운 것이었다. 

 가부장제 남성이 지키는 규범은 스스로가 ‘진짜 남성(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한 규범들뿐이다. 자신보다 높은 남성에게 “형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극존칭으로 존대하고, 이를 자신보다 낮은 남자들에게 똑같이 요구하는, 그들 끼리만의 예의범절 말이다. 가부장제의 남성 집단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누구든지 축출할 힘을 가지고 있다. 안에서는 서로 격려하고 북돋워주며, 호모소셜 위반의 금기(“Don't be sissy”)만 지키면 판단과 처벌, 더 나아가 관용과 베풂까지도 해낼 수 있는 자유로운 권력주체로 인정해주는 이들이 가부장제의 남성들이다. 감정을 지우고 이성을 숭배한다지만,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와 그것을 부여해주는 이 구조에 작은 흠집이라도 내려는 이들을 감정적으로 비난하고 ‘이름 짓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런데 이제는 호모소셜 집단에 들어올 자격도 없던 ‘계집애들’ 눈치나 봐야 하는 세상이 온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적어진다. 눈에 불을 켜고 메갈리아를 한국사회에서 가장 악한 집단으로 여겨지는 ‘일베’에 비유하며 추방하려는 이유다. 하연수와 박신혜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당해왔던 규범의 힘이 역으로 그들을 옭아매는데, 이는 한국 사회가 한 번도 맞닥뜨리지 못했던 낯선 장면이었다. 권력주체 남성들은 메갈리아를 힐난하고 이 사회에서 추방시키려 했지만, 그럼에도 메갈리아의 존재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더욱이 메갈리안들은 구조의 힘에 거슬러 권력주체인 남성들 대상으로 새로운 ‘이름짓기’를 행했다. 이 새로운 ‘이름짓기’는 여성을 향한 이름짓기와 대조적으로, 결코 부당한 차별이라 볼 수 없었다.

 메갈리아가 반사하는 미러링의 언어에는 남성들의 폭력적 언어를 성별만 바꾸어 반사하는 것들(“한국여자들은 가슴이 작다”―“한남이들은 6.9 실좆이다”, “보지의 적은 보지”―“자지의 적은 자지”, “김치년들 배빵하고 싶다.”―“한남충들 자지커팅하고 싶다.” …….)도 있지만, 새로운 의미로 쓰이게 된 것도 있었다. 바로 “씹치남”과 “한남충”이다. 이 단어들은 “김치년”이나 “맘충” 등의 여성혐오 어휘에 대응해 만들어진 단어였으나 메갈리안들이 그 어휘에 부여한 의미는 어원과는 다소 달랐다. 김치년의 경우, 남성들의 눈에 비친 드센 한국여성의 환상, 즉 사치스럽고, 기가 세며, 더치페이를 안 하는 등, 권력주체(여야만 하는) 남성의 비위를 거슬르는 여성의 특징들을 여성일반으로 확장하여 틀 짓는 언어였다. 가부장제의 남성은 관계에서의 모든 잘잘못을 자신이 성찰하게 하는 대신 타인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데, 김치년은 그런 맥락에서 경제적인 주체로서의 남성 역할(가부장)에 실패한 자신을 인정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 단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순 없으니 애꿎은 여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반면에, 남성시선의 환상에 기반을 둔 김치년과는 달리 한남충은 남성의 실제적인 가해와 폭력의 양상에 근간해 만들어진 단어다. 김치년의 속성들이 남성들의 필요 때문에 한국여성에게서 반드시 발견되어야만 하는 것들이었다면, 한남충들의 폭력성은 한국 사회의 남성이 흔히 저지르던 위반들, 즉 환상이 아니라 사실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한남충이나 씹치남이 메갈리아가 일삼는 극도의 혐오표현이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한남충이 ‘되지 않으려면’ 남성은 무엇을 하면 되는가. 여자를 때리지 않기. 여자를 강간하지 않기. 여자를 살인하지 않기.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손 씻고 나오기. 티브이만 보지 말고 집안일 하기. 리벤지 포르노 보지 않기. 지하철에서 쩍벌을 하지 않고, 임산부석에 앉지 않기. 외모와 능력에 대한 자화과찬을 중지하고 겸손해지기. (“남자는 와인과 같다”는 말은 얼마나 우스운가) 타인을 아랫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가르치려 들지 않기……. 이 얼마나 ‘당연한’ 것들인가. 그러나 이것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남성들이 습관적으로 지키지 않던 것들이었으며, 사회는 어떤 남성이 이를 위반했다고 해서 ‘엄청나게 강력한’ 처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들을 겨냥한 메갈리아의 ‘이름짓기’의 효과는 가부장제의 부당한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엄연히 존재하는 남성의 가해 사실들을 폭로하고 규제하려는 것이 메갈리아다. 이쯤이 되면 메갈리안은 남성 혐오하는 사회악이기는 커녕, 이 사회를 진일보하게 만드는 선한 이들이다. 아직도 남성들은 자신이 한남충일 가능성을 일절 부정하고, 여성혐오는 자신과는 전혀 관련 없다 단언하며, 그러니 자신을 잠재적 가해자로 부르는 것을 절대 참을 수 없다면서 분노로 몸을 떤다. 이제는 “이퀄리즘(equalism)”이니 뭐니 하면서 성평등을 지향하는 척, 어떻게든 가해의식에서 벗어나려는 추태까지 보인다. 그들은 여태껏 얼마나 자유로웠던 것인가.


메갈리아를 불태워라

 여성혐오에 무감한 자들은, 여성인 어떤 사람에게 이상한 편견을 갖고 능력을 가치절하하며 폭력을 일삼는 이들만 있는 게 아니다. 메갈리안들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고통받아왔던 타자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여성혐오에 무감한 것이다. 이 세상에 성과 관련해서 한쪽에는 일베가, 다른 한쪽에는 메갈이 있다는 착각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상황이 가는 대로 지켜보는” 결백한 관조자적 입장에 세워놓는 그 태도가 바로 가부장제를 강화하고 공고히 유지한다.

어떤 혐오도 하지 않는 깨끗함으로 자기 안위만 중시하며 자위하는 일을 그만두라. 이 세상에 깨끗한 사람은 없다. 모종의 이유로 ‘메갈리안’이 되지 못하겠다면, 적어도 이 세상의 ‘모든’ 메갈리아를 불태워라. 메갈리아는 이 사회의 모습을 비추었으므로, 메갈리아를 불태우는 일은 당신과 이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가부장제를 깡그리 불태우는 일이 돼야만 할 것이다. 메갈리아를 완전히 소각시켜버리고 싶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강박이다. 지금 그들의 스탠스가, 속 좁은 “한남충”이나 취할 법한 게 아니라고 증명되려면 말이다. “나는 그런 적 없는데”라는 변명으로 메갈리아의 메시지를 거부한 이상, 혐의 없는 그들의 미래에는 필히 메갈리아가 비추었던 억압과 폭력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강박적 다짐이 끊임없이 되새겨져야 한다.



외부원고의 편집방향은 본지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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