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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과 윤리의 교집합



예술과 윤리의 교집합



편집위원 | 한승이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다

 지난 5월 31일, 홍대 정문에 일베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세워졌다. 홍대 조소과 4학년 홍기하씨의 작품으로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다’는 제목이 붙여졌다. 조각상은 설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SNS에 캡쳐가 올라왔고, 많은 사람이 불쾌감과 혐오감을 드러냈다. 홍대생의 반발도 많았다. ‘홍대 정문’이라는 장소에 일베 상징물을 세우는 것은 학교 전체의 명예 훼손이라는 주장이었다. 조각상에 달걀이 던져졌고, 실제로 홍대생 두 명이 조각상을 훼손하다가 현장에서 제지당했다. 그리고 1일 새벽, 어떤 래퍼가 결국 조각상을 부쉈다. 논란이 된 이후 홍기하 씨가 밝힌 작품 의도는 이렇다.


1. 일베에 대한 스탠스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니다.

2. 일베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회현상이고,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실재이다. 존재하지만 실체는 없는 추상명사인 일베를 실체화해 논쟁을 일으키려 했다.

3. 의도적으로 정문에 설치했다. 공공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4. 부정적인 반응을 예상했다. 일베를 상징하기 때문에 계란을 던지거나 부순다는 말을 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라 생각한다. 하지만 작품을 파손하는 건 다른 문제다. 또한, 작품을 내릴 의향도 없다.


 이 조각상을 두고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일베 조각상을 나치 상징물,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상징물로 비교하며 저런 혐오스러운 것을 보지 않을 내 눈의 권리를 외쳤다. 또 학교의 명예가 실추된다, 부끄럽다는 인식도 많았다. 대표적인 말로는 “저런 것도 예술이냐.”가 있다. 반면에 작가의 의도를 언급하며 표현의 권리를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후자에 가까웠다. 그런데 나도 처음에는 혐오스러웠다. 앞뒤 사정 모르고 사진을 봤을 때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뭘 저딴 걸 전시해? 3초 정도 뒤에야 작가의 의도를 모른다는 생각에 판단을 유보했고, 의도를 들었을 때 비로소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일 그 사람이 예술작품으로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일베를 논했다면 나는 수긍할 수 있었을까? 도덕성의 측면에서, 개인의 다른 표현 방식과 비교해봤을 때 예술은 더 관용적이다. 김동인의 소설 ‘광염 소나타’는 그것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어떤 의견 말씀이오니까?"

"어떤 <기회>라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가지고 있는 천재와 함께, 범죄 본능까지 끌어내었다 하면, 우리는 그 <기회>를 저주해야겠습니까, 혹은 축복하여야겠습니까?  이 성수의 일로 말하자면 방화, 사체 모욕, 시간, 살인, 온갖 죄를 다 범했어요.  우리 예술가협회에서 별 수단을 다 써서 정부에 탄원하고 재판소에 탄원하고 해서, 겨우 성수를 정신병자라 하는 명목 아래 정신병원에 감금했지,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 사형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그 편지를 보셔도 짐작하시겠지만, 통상시에는 그 사람은 아주 명민하고 점잖고 온화한 청년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 뭐랄까, 그 흥분 때문에 눈이 아득하여져서 무서운 죄를 범하고, 그 죄를 범한 다음에는 훌륭한 예술을 하나씩 산출합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범죄를 밉게 보아야 합니까, 혹은 범죄 때문에 생겨난 예술을 보아서 죄를 용서하여야 합니까?“

"그거야, 죄를 범치 않고 예술을 만들어 냈으면 더 좋지 않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러나 성수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니깐,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결하렵니까?"

"죄를 벌해야지요.  죄악이 성하는 것을 그냥 볼 수는 없습니다."

K씨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술가의 견지로는 또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베토벤 이후로는 음악이라 하는 것이 차차 힘이 빠져가서 꽃이나 계집이나 찬미할 줄 알고 연애나 칭송할 줄 알아서, 선이 굵은 것은 볼 수가 없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엄정한 작곡법이 있어서, 그것은 마치 수학의 방정식과 같이 작곡에 대한 온갖 자유스런 경지를 제한해 놓았으니깐, 이후에 생겨나는 음악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전에는 한 기술이 될 것이지, 예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술가에게는 이것이 쓸쓸해요.  힘있는 예술, 선이 굵은 예술, 야성으로 충일된 예술, ―우리는 이것을 기다린 지 오랬습니다.  그럴 때에, 백 성수가 나타났습니다.  사실 말이지 백성수의 그의 예술은, 그 하나 하나가 모두 우리의 문화를 영구히 빛낼 보물입니다.  우리의 문화의 기념탑입니다.  방화?  살인?  변변치 않은 집 개, 변변치 않은 사람 개는, 그의 예술의 하나가 산출되는 데 희생하라면 결코 아깝지 않습니다.  천 년에 한 번, 만 년에 한 번 날지 못 날지 모르는 큰 천재를, 몇 개의 변변치 않은 범죄를 구실로 이 세상에서 없이하여 버린다 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 아닐까요.  적어도 우리 예술가에게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합니다

 만일 어떤 예술 작품이 비도덕적인, 비인간적인 측면을 가진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 사실 예술과 도덕은 예전부터 굉장히 핫한 주제였고 많은 이들이 이미 다양한 입장을 표해왔다. 도덕과 예술에 관한 철학이 발전할 즈음-고대 그리스-부터 꽤 최근까지, 많은 사람이 예술적 가치가 도덕적 가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예술은 결국 선(善)을 표현한다거나, 예술은 감상자에게 도덕적으로 훌륭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거나. 그러다 최근 18세기 이후에야 도덕은 예술과 무관하거나, 서로 자율적인 영역에 있다는 의견이 등장한다. 앞의 주장은 극단적 도덕주의, 뒤의 주장은 자율주의로 불린다. 그 사이에 있는 것들이 온건 도덕주의, 온건 자율주의 등이다. 또 어떤 작품들은 바로 그 도덕적인 결함으로 인해 비로소 미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반도덕주의도 나타났다. 요즘 트랜드는 온건 도덕주의, 온건 자율주의, 비도덕주의 등으로, 도덕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는 상호종속적이지는 않지만 상관성은 가지고 있다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상식 안에서도 이론 간의 차이점은 분명히 있고, 그걸 규정짓는 건 대개 ‘도덕적 가치의 평가 기준의 모호함’이다.


개애똥같은 소리

 예술작품에서의 비도덕성을 논할 때, 가장 극단적인 예시는 예술을 위해 다른 이의 생명을 빼앗는 경우일 거다. 앞서 말한 소설 ‘광염 소나타’의 백성수. 그는 방화, 살인 등을 통해 ‘악마적’이라고 할 만한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 그나마 그는 가상의 인물이다. 실제의 예로 아마추어 사진작가 이동식이 있었다. 그는 수차례나 사진 공모전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었고, 주로 여성의 나체-목이 졸려 죽어가거나 가슴에 과도가 꽂힌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를 찍었다. 그의 사진 세계는 피와 고문, 죽음 그리고 성으로 압축된다.

 그는 희생자를 속여 산에 데려간 후 청산가리를 먹였다. 그녀는 고통 속에 죽어갔고 이동식은 죽음의 순간들을 포착해 21장의 사진을 찍었다. 살인을 저지른 후, 왜 그랬냐는 형사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내가 저지른 건 살인이 아니다. 나는 예술을 부활시킨 것이다.” 살인을 극적인 예술의 한 장면으로 연출했다는 점에서 이동식은 진정한 또라이였다. 그는 또 이런 말도 남겼다. ‘사람이 죽는 순간이 그 사람 인생에서 가장 숭고한 시간이며, 이를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야말로 예술 중의 예술이다.’ 개똥 같은 소리.


논란의 시작-표현의 자유

 사실 앞의 예시야 논란이 생길 일은 아니다. 타인의 권리를, 그것도 생명을 강탈하는 행위는 예술을 위해서건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건 동의할 일 없다. 설령 개를 죽이며 유기견으로 죽어가는 개들의 현실을 표현한다고 말해봤자, 그 예술가의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말밖에 안 된다. 논란의 시작은 다음부터다. 제작과정이 비도덕적인 경우,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가 비도덕적인 경우, 작가 본인의 도덕성이 의심되는 경우, 작품 내에서 비도덕적인 가치관을 긍정하는 경우, 도덕성의 기준을 정하기 헷갈리는 경우 등. 매우 많다.

 그 많은 경우 중에 우리나라에서 논란이 됐던 건 힙합 장르에서 나타나는 혐오 발언이다. 대표적인 게 쇼미더머니의 산부인과 드립.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도덕주의자’들을 물리치려 한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 이는 공리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인데, 이 주장에는 두 가지 대전제가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의 자유는 ‘개인에 대한 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개인의 표현의 자유’다. 국가가 개인을 검열하는 일만 아니라면 상호 간의 비판이던 여론을 통한 비판이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도 조건이 따른다.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자유는 무조건 옹호되어야 한다는 것. 혐오 표현은 나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 소수자가 정신적 사회적, 그리고 물리적 폭력을 당할 가능성을 굉장히 높인다. 그러니 표현의 자유의 ‘표현’에 혐오 표현은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류의 ‘비도덕성’은 여론의 비난으로, 또는 필요하다면 법으로까지 규제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혐오를 마음껏 내비치기 위해 예술을 갖다 붙이는 건 제발 멈췄으면.


혼란스러운 현대 예술

 도덕과 예술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형식과 도덕성이라는 양 측면에서, 이전에는 예술이라고 생각될 수도 없고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했을 작품들도 현재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뒤샹이 철물점에서 변기를 사 전시에 출품한 이후로 그랬다.

 2007년, 남미의 예술가 기예르모 바르가스의 행위 예술, <You are What you read>는 예술과 윤리에 대해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바싹 마른 유기견을 물도, 먹이도 없이 전시회에 묶어 놓았다. 당시 퍼진 기사 내용은 이랬다. ‘예술가가 전시장에 병든 유기견을 데려다가 죽을 때까지 물도, 먹이도 주지 않았다. 결국 그 개는 전시 다음 날에 죽어버렸고, 더 끔찍한 건 개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사료로 메시지를 적어놓았다더라!’ 사람들은 분개해 예술가를 욕했으며 많은 동물 단체들이 항의하고 그를 고소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하루 뒤 다른 신문기사에 갤러리 관장의 해명이 실렸다. 개에게는 정기적으로 먹이가 주어졌으며, 전시기간동안 하루 3시간만 묶여있었다. 그리고 전시가 끝나자 개는 떠나버렸다, 고.


 바르가스가 밝힌 작업 의도는 이렇다.

1. 이 전시는 사람들의 위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거리’의 굶어죽어 가는 개에게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각주:1]

2. 작업의 계기는 한 노숙자가 대형견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아무도 행동하지 않은 것을 봤을 때. 그 현장에는 언론사와 경찰, 소방구조원, 안전요원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다.

3. 그들은 거리의 개는 외면했지만 전시장의 개는 도우려했다. 사람들이 개에 대해 오해하도록 내버려두었고 본인에 대한 가십이 퍼질 것도 예상했다. 그를 탄원하는 서명운동을 만든 것도 장본인이고, 그는 심지어 거기에 싸인까지 했다.


 모든 것이 그의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하지만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그는 유기견을 잡아서 묶어놓은 것과, 적절한 치료를 해주지 않은 행동으로 국제 동물 보호 단체로부터 비난 받았다.

 오해와 진실, 작가의 의도까지 들었으니 이제 그 프로젝트에 대한 평을 내릴 수 있다. 이게 작가의 의도라면, 꽤 괜찮은 프로젝트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 치료해주지 않고 다시 내놓은 건 분명히 도덕적이지는 않지만, 밥은 줬다지 않은가. 평상시에도 유기견을 지나치는 이들은 많다. 개를 묶어놓는 건..... 사실 어쩌겠는가? 묶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있지 않았을 테고, 하루 온종일 짧은 줄로 매여 있는 우리나라의 진돌이들보다는 나은 환경이다. 게다가 사람들의 오해까지 프로젝트에 포함시킨 건 기발한 일이다. 그 전시에 갔던 이들은 뒤에 해명 기사를 봤을 테고, 전시의 의도도 들었을 것이다. 앞으로 길거리를 지나가다 거리의 개를 보면 그 때의 자신이 생각나지 않을까? 혹시 모른다. 개에게 뭐 하나라도 줄지.


제 마음입니다

 일베 조각상을 부순 사람은 ‘작가의 의도가 뭐든 다짜고짜 혐오스러운 것을 눈앞에 들이대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단지 혐오스러운 것을 전시했다고 그것을 파괴할 권리는 있지 않다. 혐오는 개인의 주관적인 기준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인데, 어떻게 대상물이 혐오스럽다고 그 표현 의도와도 상관없이 그것을 부술 권리가 있을까. 더군다나 일베 조각상을 히틀러 동상과 같게 보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작가의 의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사람들의 반응까지도 그 의도 안에 포함시킨 작품이었다. 홍익대의 명예를 운운해가며 건드릴 문제는 전혀 아니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제작자에게 항의하거나 그냥 지나갔으면 될 일이다.

 이 일은 많은 이들이 현대 미술을 단순하게 본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다. 일베 조각상은 광화문의 세종대왕상처럼 간단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또 예술은 아름다운 것만을 표현해야 한다는 굳건한 믿음도 그들에게는 있는 것 같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현대 예술은 전혀 미에 봉사하지 않는다. 미적으로 추한 것을 작가가 의도했다면, 그것도 작품이다. 일베 조각상이 꼭 일베를 상징하지는 않는다. 일베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면 변형을 가했어야 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일베가 현실에서 자신을 당당히 드러낼 수 없어서 몰래 취하던 제스쳐를 홍대 정문에 대형 조각물로 신원을 밝혀 설치해놓은 것부터가 일베와는 다르다.

 이제껏 많은 얘기를 했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완벽하게 내려진 답은 없다. 더구나 도덕성과 예술에 관한 문제는 굉장히 복잡하다. 예술은 근대 이후로 굉장히 다양한 층위와 논의를 만들어 내왔고, 도덕성이야 과학기술이 발달한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항상 중요한 문제가 문제였다. 그 두 개가 섞이니 답을 찾을 수나 있을까. 어디까지 만들지,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각자의 몫이다. 답은 각자가 내려야 한다. 어느 한 스탠스를 골라도 좋고, 자신만의 가치관은 더욱 좋다. 그러나 만일 작품의 도덕성을 논할 일이 있다면, 그 이전에 작가의 의도부터 따지고 봐야한다. 비난은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한승이

seang0449@gmail.com

고릴라





  1. 남미의 길거리에는 개가 아주아주 많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