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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스물 아홉에 죽기로 결심했다




스물아홉에 죽기로 결심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일찍 죽겠다고 얘기하자.

왜냐고? 읽어보면 안다.


 

러비 뒷방 늙은이 | 남영주



■ 

“스물아홉에 죽을 거야”


 아마도 스물하고 조금 지났을 무렵부터였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왜 그렇게 빨리 죽고 싶으냐고 물으면 그냥 “오래 살아 뭐해요”라고 대답했었다. 사실 일일이 설명하기가 귀찮아서 이렇게 대답했다. 한번 쓰면 많은 사람에게 한 번에 설명할 수 있는 러비에 글을 쓰고 있으니 여기서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핑계를 대며 그냥 하고 싶은 얘기를 좀 하겠다. 재미없어도 많이 읽어 주시길.

 

 이유는 뭐 이렇다. 나는 경상도에서 자랐다. (지역감정을 말하고 싶진 않지만, 통계가 그러니 어쩔 수 있나) 선거만 하면 붉은 물결이 넘실넘실대는 곳이다. 나에게 보이고 들리는 이야기들을 충분히 고민하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능력이 없었던 나는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고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어렸지만 싫었던 것 같다. 왜냐면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이 짜증나 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나에게 큰 변화의 순간이 왔다. 머리가 조금 더 컸고, 책도 조금 더 읽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나는 정치색을 갖게 됐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나는 얕고 짧지만 생각을 조금은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등학교 삼학년이 됐다. 그해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께서 돌아가셨다. 살던 동네가 봉하마을과 가까워 생전에도 몇 번 찾아갔었던 터라 돌아가신 다음날 봉하에 갔다. 사실 사람이 죽었다는 슬픔을 빼면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갔었다. 그런데 그 곳의 장면은 참 충격적이었다. 이 하나의 사건이 내게 충격요법이 되었던 것이었는지 나는 세상의 다른 목소리들을 조금씩 들을 수 있게 됐다. 다시 말해 내 아버지, 내 가족, 내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와 다른 이야기를 목소리로 들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내게는 너무 당연하지만 큰 변화였다. 목소리를 듣게 되면 당연히 궁금증이 따라오게 되는 것 같다. 그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왜 내가 듣던 목소리와는 다른지 몹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는 천천히 그리고 갑자기 변했다. 그렇게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나고 지금의 내가 됐다.

 스물아홉에 죽겠다 생각했던 건 아마 4년 혹은 5년 정도 전일 것이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 내가 좋다. 그런데 나는 계속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내 주변의 사람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은 20대를 살았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왜? 지금은 대체 왜 저렇게 ‘꼰대’가 되어서 나를 괴롭히는가 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게 돌아오는 대답은 ‘나이’밖에 없었다. 우리가 얘기하는 사회적 진보는 언제나 목소리를 들리게 해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 구조 그리고 그들이 살아왔던 경험들에 대해서 관성이 커져 보수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꽤나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당연히! 다음은 ‘나는 그럼 그 관성을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이렇게 목소리 치고 있는 것이 그저 어려서라면 나이가 더 들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2016년의 지금처럼 우리나라 사회가 말도 안 되게 거지같아도 화가 치솟는 사회라고 하더라도 나는 20대의 나처럼 화를 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물아홉에 죽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죽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 죽어야겠다, 혹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죽기 전에 세상이 바뀔까?

 

 스물아홉에 죽겠다 결심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만약 내가 꼰대가 되지 않고 나이를 더 들어서도 아득바득 싸우고 말하며 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내가 죽기 전에 변화한 우리나라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이렇게 목소리 내는 사람이 많은데 광화문 거리에서 피를 토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이렇게도 많은데, 우리 사회는 점점 역사 속으로 되돌아가기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의 관성이라고 할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회는 광화문 차벽처럼 철옹성 같았다.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이 부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내는 데에 힘이 부친다는 것. 사실 그건 내 작은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와 함께가 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보고싶어하는 세상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심하게 말하면 그냥 헛짓거리하는 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헛짓거리는 말해놓고도 심했다. 그래 이 목소리가 세상을 바꾸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하지만 엄청 늦을 수도 있다는 그런 얘기였다. 다른 말로 내가 죽기 전에는 내가 그리고 나와 함께하는 친구들이 바라는 세상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죽기 전에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 어마무시하게 무서운 말이다. 많은 사람들의 의지를 꺾어버릴 말이다. 그들의 동력을 빼앗아갈 말이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이 말이 슬랙티비스트[각주:1]의 많은 부분을 만들어냈을 것이라 생각한다. 슬랙티비스트를 뭐라할 마음은 사실 없다. 그저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송곳같은 사람이 많아질 수만 있으면 그뿐이다. 어찌됐건 죽기 전에 변화한 세상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익숙한 비관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평생 들리지 않을 목소리를 내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 때문에 열심히 떠들고 깝칠 수 있는 스물아홉까지만 살기로 마음먹었다.

 


“병원에 한 번 가봐”

 

 내가 스물아홉에 죽겠다고 얘기할 때 주변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 부류였다. 하나는 (너무 고맙게도) “영주야 죽지 마,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야지”이고, 나머지 하나는 “너 같은 애들 많아. 근데 다 안 죽더라”였다. 사실 후자가 나와 좀 더 친밀하고 나를 더 알 것 같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런 응답이 아니라 정말 나를 화나게 했던 말이 있다. 바로 “병원에 한 번 가봐”이다.

 나도 안다. 스물아홉에 죽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멍청한 것인지 그리고 말이 안 되는지 안다. 그럼에도 내가 죽겠다 결심하고 그 생각이 진심인 것은 내가 그토록 증오하고 분노하는 그럼 사람이 된 모습을 스스로 견디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죽는 것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작은 목소리를 내고 얘기하는 것이 내 정체성에 너무나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았던 한 사람이 내게 병원에 한 번 가보랬다. 그 사람의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병원에 가봐라. 거기는 오늘 하루가 치열하고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곳이다. 그런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은데 왜 너는 목숨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냐는 그런 말이었다.

 듣자마자 화가 들끓었다. 나는 정말 꼰대가 되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 생명에 대한 경외로움이, 소중함이 없어서 죽겠다 결심한 것이 아니다. 꼰대가 되어서 듣는 귀가 먹고 외골수처럼 살 바에야 죽겠다는 것이다. 사회를 떠나서 내 주변을 떠나서 내 스스로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 말은 내게 삶에 대해서 한 번쯤 다시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긴 했다.

 


믿음이 깨졌다.

 

 그러어느 날 믿음이 깨졌다. 우선 우리가 꼭 세상을 변화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아니 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그 도움은 끊임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스물아홉에 죽는다면 나는 딱 그만큼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게 싫어졌다. 나는 내가 내는 목소리가 뭔가 대단한 것 마냥 착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주변 사람들의 변화를 촉발할 수 있으면 그뿐이다. 우리로 인해 우리와 함께 생각하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많아지는 것. 그래서 함께할 수 있는 것. 함께하며 더 좋은 사회를 위해 이야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것. 이런 작용을 나는 기대했어야 한다. 내가 너무 건방졌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빨리 변하고 있었다. 이번 총선 때 나는 친구와 함께 새누리당 175석에 내기를 했다. 그런데 알다시피 내 예상을 아주 정확하게 빗나갔다! 친구에게 술 한잔 사는 것이 기뻤다. 물론 아직은 한참 멀었지만, 우리가 했던 생각이 단지 우리의 생각은 아니었다. 요즘 5.18을 민주화항쟁으로 부르지 말자는 얘기를 간혹 듣는다. 이는 예상과 달리 광주를 민주화항쟁만으로 남겨놓지 말자는 이야기이다. 1980년 이후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에서 5.18의 의미는 점점 잊혀 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5.18을 폭력에도 항쟁했던 시민의식으로 기억하자는 말이었다. 불과 36년이 지난 지금 5.18의 재해석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끊임없었던 그들의 목소리가 우리의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을 반증하지는 않을까. 이렇게 내가 스물아홉에 죽겠다 생각했던 이유가 점점 희미해져 왔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던 중 내게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평생을 아득바득 싸우고 이야기하고 논쟁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좌우명을 ‘죽을 때까지 아득바득’이라 새로 지었다. 그리고 정말 죽을 때 까지 한번 열심히 살아보자 다짐했다. 지금 내가 아직 어리석고 짧을지언정 끊임없이 토론하고 스스로 변화하며 살아가고자 다짐했다. 하지만 스물아홉에 죽겠다는 말을 잊지는 않았다. 이 말은 이제 내게 나를 다그치는 삶의 관성에 무너지지말라는 성찰의 준거가 되었다.



 


남영주

러비 전 편집장. 이상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멀쩡하고

멀쩡하다고 생각하고 보면 또 이상한 사람.

-러비 작성






[베를린 장벽]

우리네 인생 항상 벽을 무너뜨리는 일이 되어야지 않을까.

벽을 쌓는 관성을 이기지 못한다면 꼰대 혹은 노인이 될 거다.

끊임없이 벽을 쌓고 무너뜨리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1. 게으르다는 뜻의 slack과 운동가라는 뜻의 activist가 합쳐진 말이다. 평소에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 말하고 거리로 나가는 등의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