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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정상인듯 정상 아닌 정상같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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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인 듯 정상 아닌 정상 같은 너

편집위원⎟강연주

 

 ‘b급’이라는 단어의 존재만으로도 우리는 그 위에 또 다른 급이 존재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대중적 취향의 여집합으로 이루어진 b급은, 본래 비주류적인 문화를 의미하고 있으나 어감에서 오는 느낌 탓인지 하위영역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b급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돌려버리기 일쑤이나, 그럼에도 그들의 역사는 끊어지지 않은 채 지금도 쓰이고 있다. 이를 단순한 우연으로 단정 짓는 것은 조금 어려울 것 같다. 대화 속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단어지만 막상 설명하려면 적당한 수식어를 찾지 못해 괜히 머리만 긁적이게 되는 b급이란 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수많은 대중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완전히 외면 받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바야흐로 b급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에 대해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다B치 코드

b급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흔히 알려진 대중적인 문화와의 차이를 밝혀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시 말해, b급이 무엇이라고 정의하기 위해서는 그와 다른 등급을 구분 짓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해당 작품에 투자한 금액의 차이가 가장 뚜렷한 구분 선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최초의 b급 영화는 1930년대 할리우드가 경영난에 맞서 제작하게 된, 저예산 영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도 그 경계선이 완전히 흐려지지는 않았으나, 새로이 떠오르는 기준점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작품에 투자한 돈이 수억에 다다르든, 몇백만 원밖에 되지 않든, 그 작품이 b급일 때마다 느끼는 특유의 정서. 어떤 수치로 재단할 수 없는, 그럼에도 우리가 어떤 작품과 맞닥뜨렸을 때 ‘아, 얘는 b급이구나!’하고 판단하게 하는. 소위 ‘b급 코드’가 바로 그것이다.

 

B일B재

 지난해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하 마리텔)’에서 김구라의 채널에 이상원 감독이 게스트로 출연해 영화를 주제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역시 b급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는데, 이때 이상원 감독은 b급 정서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b급과 그 이외의 것을 구분 짓는 것이 단순히 제작비 따위의 수적인 구분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증명한 셈이 되었다. 해당 방영분에서는 b급의 정의뿐 아니라 몇 가지 b급 영화를 추천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특히 호불호가 갈리기 쉬운 것이 영화인데, 거기다 대부분은 쉽사리 시도하지 못하는 ‘b급’이라는 수식이 붙기에 추천은 매우 조심스러우며 크게 의미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어떤 영화를 추천한다기보다는, 거듭해서 언급되는 b급 코드가 무엇인지, 머릿속에서 맴돌지만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 이미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도록 예시를 들어보려고 한다.

가장 먼저, 마리텔에서 김구라가 적극적으로 추천한 ‘쥬랜더(Zoolander, 2001)’. 패션계와 암살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요소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실소를 짓게 하는 황당한 전개를 펼친다. 아주 희박하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흥미가 생겨 영화를 찾아볼 사람들을 위해 영화의 자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이 영화가 b급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 자체가 앞으로 황당하고 어이없는 사건이 등장할 것임을 알리기에 전혀 스포일러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뿌리가 머나먼 외국에 있을지라도, 우리나라 역시 b급 영화를 제작해왔다. ‘재밌는 영화(Fun Movie, 2002)’는 제목이 곧 내용인, 아주 재미...있는 코미디 영화이다. 한 가지 독특한 점은 ‘재밌는 영화’가 국내 최초의 패러디 영화라는 것이다. 기본 스토리는 ‘쉬리(Swiri, 1998)’를 따라가는데, 거기에 ‘엽기적인 그녀(My Sassy Girl, 2001)’, ‘박하사탕(Peppermint Candy, 1999)’을 비롯한 다양한 영화의 패러디까지 삽입되어 있어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다. 다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한 편의 영화에서 유명 영화들의 요소가 마구잡이로 발견된다는 사실이 대중에게는 크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영화는 그리 흥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화를 관람한 일부 관객들은, 식상하고 뜬금없는 패러디 요소가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젓고 있는 가운데, 영화가 제목 그대로라고 느끼는 사람 역시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무서운 영화(Scary Movie, 2000)’는 위의 ‘재밌는 영화’와는 정반대의 제목이지만, 아이러니하게 너무도 쏙 빼닮은 영화이다. 있으나 마나 한 호러요소를 포함한 코미디 영화라는 것, 유명한 영화를 패러디했다는 것, 그리고 b급 영화답게 당최 예측할 수 없는 이상한 전개로 관객을 황당하게 만든다는 것. 서로 닮아 있는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의 반응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나도 무섭지 않은 ‘스크림(Sceam, 1996)’의 패러디는 유치했으나, 그것은 영화 내의 오류가 아닌 유머요소로 적용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제목과는 달리 아주 재밌는 영화라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b급 영화가 곧 저예산 영화라는 생각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상식으로 통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 틀을 깨는 영화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예로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 2015)’를 들 수 있겠다.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매드 맥스’가 b급 영화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 이제까지 이야기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 이제 더는 b급 영화가 저예산에 한정되어 있다고, 물론 대다수는 그러하지만, 단정 지을 수 없게 된 것이다.

 

 b급 정서는 영화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생각보다 우리 일상생활에 더욱 밀접해 있다. 텔레비전을 보거나, 혹은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볼 때 우리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광고를 보게 된다. 이때 아주 조금이라도 더 시선을 끌거나 뇌리에 오랫동안 남는 것은 정적이고 평범한 것이 아닌, 맥락 없고 생뚱맞은 것이다. 세련됨과는 억만 광년 떨어져 있는 그들이, 그럼에도 이상하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훌륭한 마케팅 전략으로 꼽히고 있다.

 P회사에서 출시한 B식혜의 광고에는 탤런트 김보성이 등장한다. 평소 남성스럽고 거친 이미지를 가진 그가 식혜 광고를 찍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식혜’ 하면 떠오르는 달콤함, 우리 전통의 맛, 고향 같은 단어들과 쉽사리 매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비틀 때, 기존에 없던 색다른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김보성의 유행어인 ‘의리’를 재치 있게 활용한 문구, 그의 거친 이미지를 오히려 살려주는 생동감 있는 영상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기에 더욱 눈길을 끈다. 보편적인 정서와는 조금 다른, 엉뚱하고 촌스러운 정서는 보기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으며 우리는 그들에게 생각보다 호의적이다.

 

정상이 아닌 B정상일지라도

 질적으로 떨어지지 않음에도 대중적인 취향에서 어렵지 않게 걸러지는 컬트적 요소, 기존의 틀에서 벗어났기에 느껴지는 낯섦 등의 요인 때문에 b급이 모든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마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을 꾸준히 응원하는 마니아층의 열정을 보았을 때, 그들 나름의 정서가 일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b급의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의 문화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자체가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것이라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음은 마찬가지이다. b급은 단순히 a급보다 뒤처지는 것들의 집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2등보다 1등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b급보다 a급을 좋아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뻔한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 창작물들은 새로운 영역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수도 있다. 그들이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말이다.



강연주

kkyj0705@naver.com

제가 본 b급영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픽셀’이었습니다. 무려 4D로 봤었는데...ㅎㅎㅎ

영화 보는 내내 바람이 불어서 머리가 엄청 엉켰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이 영화 덕에 b급과 친해지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습니다.